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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제도의 변천
사법제도의 변천

사법제도의 변천

고대사

우리나라 사법제도는 반만년이라는 역사만큼이나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고, 다양한 면모로 발전을 거듭해 왔습니다.
조선시대 이전
고조선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되었던 최초 국가인 고조선에는 ‘8조의 법’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3개 조목의 내용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며, 상해를 입힌 자는 곡물로써 배상하게 하고,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노비로 삼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고대국가 및 삼국시대
고조선 멸망 이후 다수의 부족 국가가 설립되어, 초기 고대국가 시대에는 부족회의에서 재판권을 행사하였습니다. 고대국가들이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으로 정립되면서 왕권이 강화되어 중앙집권적 정치체제가 확립되었으며, 삼국은 제각기 엄한 율령(성문법)을 제정ㆍ공포하여 사회 체제를 유지하였습니다.
고려시대
고려시대에는 71개조로 된 형법과 이를 보충하는 보조법률이 있었으나 일상생활에 관계된 것은 대개 전통적인 관습법에 따랐습니다. 태조 때에 중앙의 재판기관으로 의형대를 두었고, 공양왕 때부터 수도인 개성에서는 개성부윤이 모든 민사사건 재판을 하였고, 지방은 수령인 유수관, 부사, 지주, 현령, 감무 등이 제1심 재판을 하였으며, 안염사, 관찰사가 제2심 재판기관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중앙정부의 사법기관
의금부는 국왕의 명에 의하여 왕족ㆍ관리ㆍ사족(士族)의 범죄, 국사범, 역모죄 및 반역죄 등에 대한 재판을 단심으로 담당하는 특별기관이었고, 형조는 중죄에 대한 상소심, 법령의 조사, 감옥관리와 범죄수사, 노비와 포로 관장, 법률교육, 죄인구금 등을 담당하였습니다. 사헌부는 문무백관의 치적을 조사ㆍ규탄하며 억울한 형벌을 밝혀주는 등 감찰기관의 역할을 하였고, 한성부는 한성 내 5부와 도성 밖 10리를 관할구역으로 하여 일반행정과 경찰사무를 관장하는 동시에, 호적 및 부동산관련 재판을 전국에 걸쳐 관장하였습니다.
형벌
조선시대의 형벌은 크게 태형(笞刑), 장형(杖刑), 도형(徒刑), 유형(流刑), 사형(死刑)이 존재하였습니다. 태형(笞刑)은 가벼운 죄를 범한 자에 대해 작은 몽둥이로 치는 것이고, 장형(杖刑)은 이보다 무거운 죄를 범한 자에 대하여 큰 몽둥이로 치는 것입니다. 도형(徒刑)은 비교적 중한 죄를 범한 자에 대해 군역에 복무하게 하거나 힘든 노역을 하게 하는 것인데, 항상 장형을 함께 부과하였습니다. 유형(流刑)은 중죄를 범한 자에게 차마 사형까지는 부과하지 못하고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어 죽을 때까지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것인데 반드시 장형을 함께 부과하였습니다. 사형(死刑)은 가장 중한 형벌로 교수형과 참형이 있었습니다.
재판제도
수령은 관찰사 밑에서 각 고을을 맡아 다스리던 지방관 즉 부윤, 대도호부사, 목사, 군호부사, 유수, 군수, 현령, 현감 등의 총칭으로서 속칭 ‘원님’이라고 불리었는데, 태형(笞刑) 이하의 형사사건과 일반 민사사건의 제1심을 맡았습니다. 관찰사는 유형(流刑) 이하의 형사사건을 제1심으로 직접 처리하면서 관하 수령이 재판한 민사사건의 상소심을 맡았습니다. 상소심의 경우도 관찰사가 직접 자판한 것은 아니고 수령으로부터 보고를 받아 판결 방향을 지시하면 수령이 이에 따라 다시 판결을 내리는 방식이었습니다. 관찰사의 재판에 대하여 이의가 있는 자는 형조 또는 사건의 성격에 따라서는 감찰업무를 담당하던 사헌부에 상소할 수 있었고, 국왕에게 직소하는 길도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사형에 해당하는 죄에 대하여는 인명을 소중히 한다는 뜻에서 세 번 복심(覆審)하였으며, 최종 재판은 국왕이 담당하였습니다.
판결문
형조의 재판은 대체로 합의에 의하여 결정되었고 지방수령의 재판은 단독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판결은 문서로 표현되었는데, 판결문을 결송입안(決訟立安)이라 불었습니다. 그 내용은 판결의 취지와 이유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모든 소송 관련 문서와 증거서류 등을 제출 순서에 따라 모두 기재하고 마지막에 판결의 취지와 이유를 덧붙이는 방식이었습니다. 최근 연구 결과에 의하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조선시대 판결문은 모두 778건이며, 가장 오래된 판결문은 1517년 안동부 결송입안이라고 합니다.
재판법규
조선 시대 통치자의 통치규범이자 피치자의 행위규범인 통일법전으로서 경국대전을 비롯한 일련의 성문법전이 편찬되었습니다. 이러한 조선의 법전화 사업은 고유의 법전을 마련함으로써 통치자의 자의가 아니라 객관적인 법에 의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법치주의의 기틀을 확립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경국대전은 이전(吏典), 호전(戶典), 예전(禮典), 병전(兵典), 형전(刑典), 공전(工典)으로 구성되어 있는 방대한 종합 법전으로, 특히 사법제도와 관련해서는 형전에 재판에 관한 조항이 수록되어 있고, 예전에는 판결문을 포함한 각종 공문서의 내용과 형식에 관한 조항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근대사

조선 말기의 개혁
조선 시대의 사법제도는 재판기관과 행정기관이 구분되지 않았습니다. 조선이 일본 및 서구열강에 문호를 연 후 급진개혁파가 주도한 갑오개혁은 근대사법제도가 이 땅에 도입되는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895년 3월 25일(양력 4월 19일) 법률 제1호로 ‘재판소구성법’이 공포됨으로써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사법과 행정이 완전히 분리된 근대적인 재판제도가 뿌리 내리게 되었습니다. 재판소구성법에 의하면 재판소는 지방재판소, 한성 및 인천 기타 개항장재판소, 특별법원, 제2심인 순회재판소, 최고재판기관인 고등재판소의 5종으로 구분하여 두기로 하였고, 같은 해 4월 15일(음) 서울에 ‘한성재판소’가 설치되었습니다. 1899년 5월 30일 고등재판소는 평리원으로 개칭되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으로 인한 사법제도의 변천
불행히도 조선의 근대화는 일본 제국주의 침략으로 좌절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고종은 일제의 강압적인 요구에도 불구하고 제2차 한일협약(을사조약) 체결에 응하지 않았으나, 일본은 마치 조약이 정당하게 체결된 것처럼 통감부를 설치하고 통감부 하부기관으로 이사청(理事廳)을 두어 한국 내 일본인에 대한 재판권부터 행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09년 7월 12일 ‘한국의 사법 및 감옥사무를 일본 정부에 위탁하는 건에 관한 각서’가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 모든 한국재판소를 폐지하고 그 대신 일본재판소를 설치하며 재판사무의 취급에 있어서는 일본 법령의 적용을 원칙으로 하게 됨으로써 일제가 한국의 사법권을 장악하고 통감부재판소를 설치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통감부재판소는 조선총독부재판소로 바뀌어 일제의 식민지 재판기관 역할을 맡았는데, 조선총독이 입법권 및 행정권과 함께 사법권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조선총독부재판소는 조선총독부의 산하기관에 불과하였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헌법
1919년 3ㆍ1 운동 이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헌법에 해당하는 ‘대한민국임시헌장’을 제정하였는데, 삼권분립에 입각하여 입법기관은 임시의정원, 행정기관은 국무원, 사법기관은 법원으로 구성하였습니다. 제6장 ‘법원’ 편에서 법원은 사법관으로 조직하고, 사법관은 독립하여 재판을 행하되, 상급관청의 간섭을 받지 않으며, 법원의 재판은 안녕질서 또는 선풍양속에 방해가 있는 때를 제외하고는 공개하도록 정했습니다.
광복 이후
광복과 더불어 우리나라 사법제도는 급속한 발전을 거듭하였습니다. 1948년 7월 17일 대한민국 헌법이 공포되었는데, 헌법은 삼권분립 원칙에 따라 사법권의 독립을 보장하였습니다. 이어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이 취임하였고, 1949년 9월 26일 법원조직법이 제정ㆍ공포되었습니다. 헌법과 법원조직법은 법원이 민사소송, 형사소송, 행정소송, 선거소송 등의 법률적 쟁송을 심판하도록 하고, 대법원 이외 고등법원과 지방법원을 두어 3급3심제가 확립되었습니다. 그 후 우리나라의 정치적, 사회적 격변과 급속한 산업화로 말미암아 여러 차례에 걸쳐 헌법 개정이 있었고, 이에 따라 법원조직법도 대법관 및 법관의 임명방법, 대법관 수와 관련하여 변천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최고법원이자 상고심인 대법원을 정점으로 하여 항소심인 고등법원, 사실심인 지방법원과 그 지원 등 3심 구조로 구성된 법원조직의 골간은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현대사

현대사
1987. 10. 29. 개정된 현행 헌법은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를 꽃피우고 선진 국가를 건설하려는 우리 국민의 일관된 투쟁의 결실이었습니다. 법원 역시 법치주의를 담보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보루로서 자율성과 독립성이 최대한 보장되었습니다. 1990년대 초 들어 우리나라 경제의 선진화와 국제화, 개방화 물결을 맞아 법원은 더욱 효율적이고 전문적인 질 높은 사법서비스를 제공하여야 할 새로운 책무를 안게 되었습니다. 사법제도 개혁의 목소리는 법원뿐만 아니라 사회 각계에서도 높아졌고, 윤관 전 대법원장은 1993. 9. 취임 당시 대법원 산하 사법제도발전위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위 위원회는 대법원장에게 개혁안을 제출하였으며, 위 제안 사항은 1994. 7. 국회에서 통과되었습니다. 1995년은 근대사법제도가 시행된 지 100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대법원은 1995. 4. 25. 한국의 근대사법 100년을 되돌아보고 사법제도의 지속적인 발전을 기원하는 기념식을 거행하였습니다. 또한 법원의 역사를 정리하여 본보기로 삼고자 '법원사(The History of the Courts in Korea)'를 편찬하였습니다.
2005. 9. 취임한 이용훈 전 대법원장은 '국민을 섬기는 법원, 국민과 함께하는 법원'이라는 기치 아래, 구술심리와 공판중심주의 등 법정 중심의 재판을 확립하기 위하여 재판제도와 운영을 개선하였습니다. 또한 법정 확충 및 사무환경의 개선을 비롯한 사법시설의 대대적 정비, 종합민원실 설치와 원스톱 민원시스템의 도입 등 사법서비스의 고도화 작업을 추진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국민이 배심원으로서 형사재판에 직접 참여하는 국민참여재판 제도가 2008. 1. 1.부터 실시되었으며, 법원이 운영하는 전자소송시스템을 이용하는 전자소송제도가 2010. 4. 특허 전자소송을 시작으로 2011. 5. 민사 전자소송으로 확대되는 등 단계적으로 형사사건을 제외한 모든 사건에서 전자소송 서비스가 제공될 예정입니다. 2011. 9. 양승태 대법원장의 취임 이후에는, '국민을 위한 합리적 사법제도 구현', '평생법관제 정착과 인사제도 개선', '국민과 소통하는 투명하고 열린 법원', '사회갈등을 해소하고 통합에 기여하는 법원', '내일을 여는 세계 속의 사법부'라는 사법정책목표를 설정하고, 국민의 입장에서 보다 합리적으로 재판제도를 개선하고 국민과 소통할 수 있는 사법부를 만들기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사법발전계획 표지
* 2012년 발간된 사법발전계획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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