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가 있는 글]너는 내 운동

테마가 있는 글

[테마가 있는 글]너는 내 운동

2017.09.01

눈앞에 녀석이 있다. 오색 원판으로 스스로를 한껏 치장했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녀석은 한낱 쇳덩이에 불과하니까. 사소한 무게지만 주위에는 자못 비장한 기운이 흐른다. 할 수 있다고 되뇌며 호흡을 가다듬는다. 이 순간만큼은 내가 장미란이고, 최민호다. 조심스레 녀석을 들쳐 메고 긴장이 뒤섞인 숨을 배 쪽으로 불어넣는다. 서서히 지면으로 몸을 낮추었다가 이내 두 다리로 바닥을 힘껏 밀며 다시 몸을 일으켜 세운다. 얼굴은 벌게지고 옷은 땀으로 얼룩졌지만 기분은 좋다.

요즘 들어 운동하는 게 정말 재밌다. 모든 게 낯설고 어려운 초임 판사에게 일주일에 두 번, 시간을 내서 운동하러 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모른다. 때문에 운동하러 가는 전날 밤이면 괜스레 설레기도 하고, 무슨 운동을 하는 게 좋을지 행복한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행여 흡족하게 운동을 끝마치는 날이면 스스로가 그렇게 대견스러울 수 없다. 그런 날이면 조명이 좋은 화장실 거울 앞에선 나르시시즘의 향연이 펼쳐진다.

사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가 운동을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릴 적부터 몸 쓰는 것과 거리가 멀었던 까닭에 예전의 나는 그 흔한 팔굽혀펴기, 윗몸일으키기조차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친구들과 함께 운동하는 것은 더더욱 내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게 평생 운동이라고는 할 것 같지 않았던 내가 운동을 시작한 것은 몇 년 전 있었던 꽤나 굴욕적인 사건들 때문이었다.

#1
그중 하나는 내가 사법연수원에 다니던 시절 어느 봄날의 일이었다. 우리 반에는 언제나 생기가 넘치던 동갑내기 여자 연수생이 있었다. 나와 비슷한 눈높이의 그녀는 한눈에 보아도 힘깨나 쓸 법한 다부진 체격이었다. 그래서인지 마르기만 했던 내가(그때는 지금보다 10kg 나 가벼웠다) 그녀의 눈에는 몹시 만만하게 보였나 보다. 하루는 내게 다가와서 대뜸 자기와 팔씨름을 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설마 지겠어.’ 하는 생각에 나는 선뜻 그녀의 도전을 받아들였다. 막내끼리의 대결에 흥미를 느낀 형, 누나들이 삽시간에 나와 그녀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수많은 시선 속에서 그녀의 손을 마주 잡은 순간, 나는 무언가 굉장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아귀에 느껴지는 묵직한 기운에서 앞으로 일어날 불길한 결말을 직감한 것이다. 하지만 사태는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시작 신호와 함께, 내 가냘픈 손목은 짐작한 대로 무참히 꺾여버렸다. 승리를 예감한 그녀의 입꼬리가 얄밉게 씰룩이는 걸 보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몇 차례의 무의미한 저항 끝에 나는 결국 스무 명 남짓한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녀와의 팔씨름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2
팔씨름으로 인한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내게 더 큰 시련이 닥쳤다. 그때 우리 반 지도교수님은 연수원에서 손꼽히는 운동 마니아셨다. 공부에 힘쓰기 전에 운동을 먼저 해야 한다고 제자들에게 항상 강조하셨을 정도다. 그런 교수님에게 강력한 라이벌 교수님이 한 분 계셨는데, 어쩌다 보니 우리 반과 그 라이벌 교수님의 반 사이에 친선 축구경기가 열리게 되었다. 나는 당연히 벤치에 앉아서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전반전이 우리 반의 압도적인 우세 속에 끝나자 생각지 못한 출전 기회가 나에게 왔다. 이길 것 같으니 후보 선수에게도 기회를 주자는 이야기가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얼떨결에 나는 교수님이 뛰셨던 자리에 교체로 투입되었다.

5분 남짓 뛰었을까, 옷이 땀으로 젖기도 전에 나는 다시 그라운드 밖으로 나와야만 했다. 내가 뛰는 모습을 본 교수님이 당신의 둘도 없는 라이벌에게 패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셨던 모양이다. “상일이 안 되겠다.” 하는 짧은 탄식을 내뱉으신 후 손짓으로 나를 불러들이셨다. 그리고 당신께서 다시 그라운드로 들어가셨다. 경기는 우리 반의 승리로 끝났지만,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경기가 끝나고 뒤풀이하러 가는 길에 나를 다독이던 형에게 했던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형, 저 너무 창피해요!”

사람들 앞에서 몇 차례 망신을 당하고 난 후, 나는 비로소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바닥으로 떨어져 버린 명예를 회복하고 싶었고, 무엇보다도 ‘이젠 왼손으로 팔씨름해보지 않겠냐’며 수시로 나를 도발하는 그녀를 더 이상 가만둘 수 없었다. 마침 우리 조에 대학생 때 역도 동아리 활동을 했던 연수생이 있었기에 나는 그에게 운동을 배우기로 했다.

처음 그에게 운동을 배웠을 땐 모든 것이 힘들었다. 근력운동이라고는 별로 해본 적이 없던 터라 내가 그에게 배운 것은 기초적인 맨몸 운동에 불과했다. 하지만 초짜인 나로서는 스스로를 건사하는 것부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아무것도 들지 않았는데 땀은 비 오듯 했다. 그렇게 땀을 쏟아낸 다음이면 아릿한 통증으로 한동안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금방 늘 테니 걱정하지 말라면서 내게 파란색 파워에이드를 사주곤 했다. 그때 일산 올림픽스포츠센터 맞은편 편의점에서 종종 사 마셨던 파워에이드는 유달리 더 달콤했던 것 같다.

시간이 흘러 몸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어느 곳에 힘을 주어야 하는지 알게 되면서 나는 차츰 몸을 쓰는 재미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연수원을 수료할 때가 되었을 때쯤에는 운동과 나 사이를 가로막았던 심리적 장벽은 완전히 사라졌다.

끝내 팔씨름 그녀에게 설욕하지 못하고 연수원을 수료했지만(이겨봤자 얻을 게 없었기 때문에 재경기를 하지 않았던 겁니다!), 일련의 사건을 계기로 나는 운동과 가까워졌다. 이후 군대에서 꾸준히 운동을 했고, 이제는 운동을 하지 않으면 한 주를 어떻게 버틸지 걱정될 정도로 운동하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내가 엄청 몸이 좋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단지 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새로운 즐거움을 늦지 않은 나이에 깨달아 즐겁게 취미 생활을 하고 있을 뿐이다. 운동 덕분에 녹록지 않은 부임 첫해도 그럭저럭 잘 보내고 있는 것 같다. 어느덧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 날이 선선해지면 지금보다 운동하기에 훨씬 좋을 것 같다. 그래서 어서 가을이 왔으면 좋겠다.

글_윤상일 청주지방법원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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