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 나의 삶1] 실록으로 이야기 짓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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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07

실록으로 이야기 짓기

글. 손호영 판사(고양지원)

무심한 역사책 한 구절이 광활한 이야기를 시작하는 단서가 되는 경우가 있다. 역사책 속 단정한 문장에 ‘만약에’라는 가정, ‘알고 보니’라는 상상, ‘과연?’이라는 의문을 덧대어 보면, 마치 원래 있었던 양 이야기가 탁 트인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권위 있고 풍부한 내용을 자랑하는 역사책은 단연 조선왕조실록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왕조 25대 472년간 세상에 일어난 일, 사람들이 한 말과 행동을 차분히 기록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실록을 한글로 번역하여 2008년부터 원문과 국역문을 인터넷으로 접근 가능하도록 정녕히 제공하고 있다.

무성한 실록 숲을 가끔 한가로이 거닐다가, 제법 기특한 이야기가 제풀에 뭉글뭉글 피어오를 즈음, 다른 이들은 어떻게 실록을 활용했는지 궁금해졌다. 그간 실록을 토대로 만들어진 이야기는 얼마나 있을지, 이야기를 재구성한 방법은 무엇이었을지 당대에 널리 회자된 작품을 살펴볼 마음이 들었다.

1. 잘 알려진 인물을 재해석하는 경우

드라마 <용의 눈물>은 여말선초를 배경으로 이성계, 정도전, 이방원이 권력을 얻기 위해 각축하는 모습을 장엄하게 보여준다. 대체로 역사 흐름으로 이야기를 구성하면서, <용의 눈물>은 정도전을 비틀어 보기로 작정하였다.

실록은 정도전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도량이 좁고 시기가 많았으며, 또한 겁이 많아서 반드시 자기보다 나은 사람들을 해쳐서 그 묵은 감정을 보복하고자 하였다.”

- 태조실록 14권, 태조 7년 8월 26일 2번째 기사

실록이 신하들 평가에 관대한 편임을 고려하면 정도전에 대한 평가는 무척 박하다. <용의 눈물>은 ‘조선의 개국공신인 정도전이 권력투쟁에서 패자로 자리매김하는 바람에 폄하되지 않았을까’하는 미심쩍은 의심과 그럴듯한 가정으로 그를 재해석한다. <용의 눈물>이 바라보는 정도전은 실록과는 정반대이다.

“냉철하면서 기개가 있고 요동정벌을 외치며 제국을 꿈꿀 정도로 뜻이 컸으며 최후에는 이방원에게 절명시를 읊고 비굴한 빛 없이 담담히 마지막을 맞이한다.”

<용의 눈물>이 시도한 정도전의 재해석은 실록과 사극이 가지는 시각 차이만큼 흥미를 유발했다. 반향이 컸던 나머지 <용의 눈물> 이후 정도전은 외려 고고한 혁명가 이미지가 고착되기까지 한다.

이름 석 자로 사극을 완성하는 장희빈도 여러 차례 다른 시각에서 재해석되어 왔다. 실록에서조차 ‘자못 얼굴이 아름다왔다(숙종실록 17권, 숙종 12년 12월 10일 경신 4번째 기사)’고 할 정도로 미인이었던 장희빈을 실록은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일개 폐희(嬖姬)로서 임금의 총애를 받아 필경에는 왕비의 지위를 빼앗아 왕후에 승진하기에 이르러 화란을 끼치고 큰 파란을 일으켰다.”

- 숙종실록 10권, 숙종 6년 11월 1일 병진 1번째 기사

드라마 <동이>에서 등장하는 장희빈은 숙종으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을 때 ‘우아하고 지적이며 사려 깊은,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종국에는 실록과 같게 인현왕후를 몰아내면서 이기적이고 제 욕심을 찾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드라마 흐름 속에서 장희빈은 악녀가 아닌 깊은 층위를 가진 인격체로 묘사됨으로써 연민과 동정까지 불러일으킬 수 있는 매력을 가지게 된다.

실록에서 드러내는 인물 모습과 평가에는 사관이 지닌 주관이 스며들어 있다. 실록으로 색다른 이야기를 짓고자 한다면, 「용의 눈물」이나 「동이」처럼 실록에 배어 있는 주관을 걷어내고 선입견에 사로잡히지 않음이 첫째이겠다. 그럼으로써 인물 뒤편에 가려진 숨은 모습을 직시하고, 캐릭터를 새로이 정립하며, 캐릭터 간 부딪침으로 신선한 갈등을 창조할 수 있다.

2.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과 행적에 살을 덧붙이는 경우

실록에 홀연히 등장하는 인물을 무대에 세워 이야기를 빚을 수도 있다. 실록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켜켜이 나오고 이들은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간직하고 있다. 다소 살이 부족하다 싶으면, 연애와 사랑 이야기로 성긴 공백을 채워주면 된다.

사실 연애와 사랑은 모든 이야기가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주제 중 하나이다. 파울로 코엘류는 ‘세상에는 오직 4가지 이야기만이 존재한다’고 단정했고 그가 지목한 이야기는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 세 사람의 사랑 이야기, 권력 투쟁, 그리고 여행’이다. 네 가지 주제 중 두 가지가 사랑 이야기인 이유는 그만한 가치와 무게가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 <대장금>은 실록에 스쳐 지나가는 장금이를 불러 그를 조명했다. 실록에서는 장금이라는 의녀가 몇 차례 짧게 나온다.

“의녀 대장금(大長今)의 의술이 그 무리 중에서 조금 나으므로 바야흐로 대내(大內)에 출입하며 간병하니, 이 전체아를 대장금에게 주라.”

- 중종실록 52권, 중종 19년 12월 15일 을사 2번째 기사

“내(중종)가 여러 달병을 앓다가 이제야 거의 회복이 되었다. 약방제조와 의원들에게 상을 주지 않을 수 없다... 의녀 대장금과 계금에게는 쌀과 콩을 각각 15석씩 내리라.”

- 중종실록 73권, 중종 28년 2월 11일 갑신 1번째 기사

의술만으로는 긴 호흡을 끌어가기에 부족했던지 <대장금>은 장금이를 수라간 음식 경연에도 참여시키고, 각료 민정호와 설레는 러브라인으로 잇기도 하였다. <대장금>이 신드롬을 일으킬 정도로 격렬한 환호를 얻은 이유는 이처럼 장금이라는 낯선 인물과 다채로운 행적을 대담하면서 섬세히 이야기하였기 때문이다.

영화 <왕의 남자>는 연산군 앞에서 놀이하던 광대 공길을 내세운다.

“배우 공길이 늙은 선비 장난을 하며... 논어를 외어 말하기를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 임금이 임금답지 않고 신하가 신하답지 않으면 아무리 곡식이 있더라도 내가 먹을 수 있으랴” 하니, 왕은 그 말이 불경한 데 가깝다 하여 곤장을 쳐서 먼 곳으로 유배하였다.”

- 연산군일기 60권, 연산 11년 12월 29일 기묘 2번째 기사

<왕의 남자>는 폭군 앞에서 풍자하던 용기를 지닌 광대 공길이 가진 이미지에 여성스러움을 덧씌웠다. 이 덕분에 [장생(광대)-[공길(광대)]-연산군(임금)] 세 사람 사이에 대립이 촉발되었고, 그 대립이 주는 긴장감과 안타까움이 <왕의 남자>를 흥행가도에 올릴 수 있었다.

실록은 방대하되 친절하지 않다. 장면 장면을 제시하되 부연하지 않는다. 실록 사이사이 빈 인과와 배경을 충실한 상상력과 찬찬한 개연성으로 이어 붙일 때 이야기가 그려지고, 그 이야기는 실록에서 났으되 실록을 넘어선 작품이 된다.

3. 특이한 사건이나 현상을 따오는 경우

현대 사회에서 볼 수 없는 특별한 사건이나 희귀한 현상을 기초로 이야기를 꾸며낼 수도 있다.

조선시대는 계급제 사회로 노비가 존재했고 당연하게도 노비는 자유를 원했다. 자유를 얻는 방법은 공을 세우거나 값을 치르거나, 아니면 도망이었다. 도망간 노비를 쫓음(추노)은 폭력과 불법을 동반했고 이는 조정도 좌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흉년에 노비를 추쇄하는 것은 모두 금령이 있는데도, 해미 현감 강필건이 도망간 노비의 족속을 끝까지 추쇄하면서 혹독하게 신문하여, 한 마을이 텅 비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법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하는 사람을 그대로 버려둘 수 없으니, 잡아들여 신문하여 정죄해야 할 것입니다.”

- 숙종실록 17권, 숙종 12년 12월 13일 계해 1번째 기사

드라마 <추노>는 도망간 노비를 쫓았던 조선 당대 현상을 실감나게 복원했다. 본래 양반이었다가 노비로 전락한 뒤 사랑했던 또 다른 노비(언년이)를 찾기 위해 추노 일을 하는 대길이, 소현세자를 모시다 누명을 쓴 무관 출신 관노 송태하, 한때 친구였던 송태하에 열등감을 느끼고 그를 잡으러 다니는 벼슬아치 황철웅 등 여러 등장인물이 느끼는 우정과 애정, 미움과 증오 등을 맛깔나게 버무려 이야기로 구워냈다. 추노가 현재까지 인정받는 퓨전사극이 된 연유이다.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는 놀랍게도 실록에 묘사된 천체현상을 실마리로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양양부에서 8월 25일 미시에 품관인 전문위의 집 뜰 가운데 처마 아래의 땅 위에서 갑자기 세숫대야처럼 생긴 둥글고 빛나는 것이 나타났다.”

- 광해군일기[중초본] 20권, 광해 1년 9월 25일 계묘 3번째 기사

마치 UFO를 연상케 하는 실록을 두고 <별에서 온 그대>는 알고 보니 UFO를 타고 온 외계인이 현재까지 우리나라에 살고 있다는 기막힌 상상을 해냈다. 덕분에 초능력이 난무해도 설득력이 있었고, 외계인이 지구에 남을지 다시 고향 외계행성으로 떠날지를 마음 졸이며 몰입할 수 있었다.

실록은 마치 곳곳에 보석 같은 소재를 숨겨놓고 이야기로 탈바꿈되길 기다리는 듯, 갖가지 사건과 현상을 세세히 기록해둔다. 실록이 준비한 사건과 현상에 조금만 숨을 불어넣으면 <추노>와 <별에서 온 그대>가 그러했듯 누구도 생각지 못한 이야기가 탄생할 수 있다.

지금까지 실록에서 이야기를 풀어낸 여러 사례를 살펴보았다. 아직도 실록으로 만들 수 있는 남은 이야기가 있을까? 실록을 레고 조각에 비유한다면 이야기는 실록으로 구성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어렸을 적 레고 조각으로 이런 건물 저런 조형물을 무수히 많은 조합으로 만들어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위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충분히’가 타당함을 알 수 있다.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나래만큼 이야기가 닿을 수 있는 영역도 넓어지기 때문이다.

어느 날 실록 한 줄을 들여다보다 문득 떠오른 내용을 많은 법원 분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 용기 내어 법원사람들에 글을 보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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