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필객 1] 2033년 김 모 판사의 어느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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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06

낭만필객Ⅰ

낭만필객Ⅰ

글 김규화 판사(대구고등법원)

2033년 김 모 판사의 어느 하루

어느 판사실의 풍경
2022년 ChatGPT 열풍이 전 세계를 휩쓴 때로부터 몇 년 지나지 않아 대한민국 법원은 각고의 노력 끝에 급속도로 발전한 IT기술을 접목하여 생성형 판결문 작성 인공지능(AI) 시스템을 세계 최초로 도입하였다. 김 판사는 다른 판사들처럼 출근과 동시에 법관통합재판지원 시스템에 장착된 “AI 판결작성 시스템”을 켜고 하루를 시작한다. “헤이로봇!” 전 국민 대상 공모전을 거쳐 선정된 시스템의 이름이다. 해맑게 웃으며 저울을 들고 있는 해태 모양의 헤이로봇 엠블럼이 잠시 화면에 등장하고, 시스템이 작동을 시작한다.
“헤이로봇! 항소심 사건병합에 따른 직권파기 형사판결 양식 생성해줘” 김 판사의 외침에 판결문 작성관리 시스템과 연동된 AI 판결작성 시스템이 작동하고, 주르륵 판결 양식이 생성된다.
직권파기 사유가 있더라도 피고인의 사실오인과 법리오해 주장은 여전히 그 의미가 있지 않은가. 김 판사는 전자기록뷰어에서 사건을 불러오고 “피해자 진술 분석” 버튼을 누른다. 형사전자소송 시스템의 발전에 힘입어 이제 전자기록뷰어에는 공판기록과 증거기록에 나타난 문자정보를 저절로 분석하는 기능까지 탑재되었다.
클릭한지 5초 정도 지났을까, 피해자의 수사단계에서 한 3차례의 진술과 원심 법정진술을 요약한 내용이 표로 뜨고, 주요 진술의 변화가 한눈에 들어온다. 원심 법정진술 요약 란에 커서를 갖다 대자 진술 상세내용이 미리보기로 뜨고, 소리모양 버튼을 누르자 녹음파일 해당 구간이 재생된다. “객관적 증거와 비교” 버튼을 누르자, 신고 경위, 경찰 현장 출동 상황, CCTV 영상 관련 내용이 요약되어 뜬다.
‘이걸 예전에 부장님들 배석 시절에는 일일이 기록 보면서 표로 정리해서 분석했다지?’ 김 판사는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결과 복사하기 버튼을 눌러 프로그램이 분석한 진술 내용을 판결문에 붙여 넣는다. 이때 뜨는 경고 문구, “이 프로그램은 법관의 판단을 돕는 보조적 역할만 수행하고, 분석 결과의 정확성을 담보하지 않습니다.”
얼마 전 옆 법원에서 프로그램이 오작동한 것을 모르고 그대로 분석내용을 판결문에 옮겨 썼다가 낭패를 보았다는 모 판사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괜한 불안감에 기록을 일일이 눌러 확인해 보니 다행히 이번에는 오류가 없는 듯 했다. “피해자의 진술 내용과 관련 증거는 별지 기재와 같다. 이에 더하여 이 법원이 적법하게 채택하여 조사한 증거들에 의하여 인정되는 다음 사정을 종합하면…” 김 판사는 프로그램이 분석한 몇 가지 내용을 더 붙여 넣는다.
아직 양형판단이 남았다. “유사사건 결과비교” 버튼을 누르자, “원심양형은 동종죄명 사건의 상위 55% 구간에 위치합니다”라는 화면이 뜬다. “처벌불원”, “동종 전과 없음” 항목을 체크하니 상위 37%, 상위 13%로 숫자가 요동친다. ‘다소 형이 무거운 측면이 있군...’ 이제는 결단의 시간이다. 김 판사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번쩍 뜨고, 자판을 맹렬한 기세로 두드리기 시작한다. 비슷한 작업을 반복한 지 몇 시간이 지났을까, 아직 오후 4시에 불과한데 다음 주 선고 예정인 판결문들을 벌써 다 작성해 버렸다. 김 판사는 점심 때 부장님께서 하신 말씀이 떠올라 괜히 흐뭇해졌다 “제가 초임 시절에는 매일 12시까지 야근했는데 판결문 몇 개 쓰기도 힘들었어요, 세월이 많이 좋아졌어요!”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어느 세미나의 풍경
김 판사는 문득 며칠 전 세미나 참석 여부를 묻는 회람이 돌 때 참석란에 체크했던 게 떠올랐다. 이름하여 AI사법위원회 연구반 세미나! 헤이로봇이 개발된 초창기에 AI의 판결 관여 영역과 범위를 놓고 사회적으로 찬반 여론이 양분되자 고심 끝에 대법원 산하에 AI사법위원회가 설립되었고, 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형사·민사항소심을 시작으로 AI의 활용 영역이 전체 심급으로 확대되었다. 현재 형사사건 유형의 90%, 민사사건 유형의 70% 정도에서 AI를 적용한 판결문 작성이 가능한데, 이처럼 적용영역이 확대되는 데는 자연어 습득 방식의 AI의 오류를 방지하기 위한 준별인자를 수립하고 AI가 작성한 판결문과 실제 판결문의 대조·검증 작업에 열의를 쏟은 연구반 판사들의 역할이 컸다. 이번 세미나에서는 채권자취소 사건 유형에서 AI가 요건사실을 인식하기 위한 특별준별인자와 일반준별인자를 추출·정의하고, 가중치를 논의할 예정이라고 한다. 아마 회의가 끝나면, 연구반 소속 판사들은 다른 유형의 사건에서 성공리에 해왔던 것처럼, 새로운 유형의 사건에 대한 준별인자별 가중치를 조정해보고 그에 따라 실제 선고된 판결문과 유사한 결론이 도출되는지 검증하는 작업을 진행하리라.
김 판사가 회의에 접속하자, 참석자들이 열심히 논의를 이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AI가 자연어 습득을 잘 한다고 해도 사실관계를 요건사실에 포섭하려면 아무래도
직접 재판을 담당한 판사의 도움이 필요하겠지’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발표자가 발언을 이어갔다. “이번에 새로 개발된 AI엔진은 규범적 판단에 특화된 딥러닝 기술이 접목되었고, 준별인자 수립이나 가중치 조정에 따른 도움 없이도 실제 선고된 판결과 99% 일치하는 결과가 도출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기존과 같은 연구반의 작업이 필요 없지 않을까…” 놀라운 결과였다. 회의에 참석한 연구반 판사들은 자신의 일이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데서 오는 모호한 미소를 지었다.
“AI 결과는 통계적으로 도출된 것일 뿐 판단이유를 설명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국민에 대한 설명기능 강화를 위해서라도 준별인자는 필요합니다.” 한 참석자의 발언에 발표자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번 AI엔진은 그 이유도 제시한다는 점에서 혁신적입니다. 여기 이 버튼을 누르면 상세한 이유를 볼 수 있는데….”
“아무리 그래도 사법 판단의 작동 방식을 검증하는 것은 사법의 본질입니다. 이를 AI에만 맡겨둘 수는 없습니다.” 법조경력 20년차 최 모 부장판사의 발언에 달아오른 회의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결국 이번 작업까지는 기존 방식대로 진행하기로 의견이 모아지는 것 같았다.
김 판사는 내일 있을 재판 준비를 위해 로그아웃 버튼을 눌렀다. ‘지금이야 기존에 법관이 직접 작성한 판결문과 비교해서 검증이 가능하다고 하지만, AI가 작성한 판결문만 계속 축적되면 나중에는 판결문 작성 노하우가 사라지고, 판사는 프로그램 실행을 위한 엔터키만 치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게 아닐까’ 김 판사는 괜한 위기의식을 느꼈다. ‘그래도 엔터키는 직접 치고, 결론에 대한 책임은 판사가 지는 것이니까’ 김 판사의 눈에 컴퓨터 자판의 닳고 닳은 엔터키가 유독 크게 들어 왔다.

어느 법정의 풍경
50X호 법정, 재판장의 엄숙한 개정 선언과 함께 오전 선고기일 재판이 시작되었다. “국민의 사법 신뢰 증진과 신속한 재판을 위해 시행된 「AI의 사법활용에 관한 특별법」 제3조에 따르면, 법관은 판결 시 AI의 통계적 분석을 보조적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AI의 결론은 참고적 효력을 가질 뿐이지만 그 도출과정에 기술적 오류가 없고 그 결론이 법관의 심증에 부합하여 판결이 선고되었다면 그 결과는 한층 존중되어야 합니다.” 피고인은 원심판결의 사실오인을 항소이유로 주장하였으나, 법관이 내린 결론이 AI가 내린 결론과 다른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라면 그 주장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주문, 피고인의 항소를 기각한다” 예상대로였다.
헤이로봇 도입 초기에는 AI의 신뢰성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판사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애초에 기술발전의 집약체의 AI의 도움을 받아 선고된 원심판결에 오류가 있을 확률은 그 도움이 없었을 때보다 훨씬 낮을 수밖에 없었고, 여러 해에 걸쳐 데이터베이스가 축적되자 그 신뢰성은 더욱 높아졌다. 결국 판사들도 그 의심을 거두고 대부분 AI의 결론을 의지하게 되었다. 민사사건에서도 혁신적인 변화가 뒤따랐다. 당사자 쌍방의 동의가 있으면 재판부는 사건을 AI신속재판에 회부할 수 있고, 전자화결심 이후에 제출된 주장과 증거는 AI분석의 기초자료에서 배제하며, 법관은 AI분석결과를 별지로 첨부하여 판결이유 작성을 대체할 수 있게 되었다. AI신속재판은 점차 전통적 방식의 민사재판비중을 잠식하였다. 대부분의 민사사건 1심이 6개월 이내에, 항소심이 3개월 이내에 종결되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1심 판결에 대한 항소율은 민사사건이든 형사사건이든 별반 차이가 나지 않았다. 김 판사의 재판부에서 수많은 항소사건이 진행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 원인을 두고 여러 말이 오갔지만, 어떠한 분석도 학계와 실무의 통설로 부각되지 못했다. 김 판사는 곰곰이 독자적인 학설을 속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AI의 결론이 아무리 신뢰도가 높다고 해도, 결국 당사자들은 그 결론을 인간이 검증해주길 바래서가 아닐까’,
‘사법적 판단을 기계가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지 않을까’ 문득 김 판사는 10년 전 포털사이트 뉴스란에서 읽은 뼈아픈 댓글을 떠올렸다. ‘판사들 전부 AI로 교체해야 된다!’ 먼 옛날 이세돌 9단이 구글 알파고에게 패한 때의 충격처럼 AI 로봇판사들의 우위는 2020년대 어느 시점에 벼락처럼 찾아왔다. ‘그래도 묵묵히 기록보고 잘 듣고 고민하다 보면 AI 못지않게 좋은 재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세돌 9단도 한 판은 알파고를 이겼듯, 헤이로봇이 대세가 된 2033년에도 법관의 역할이 남아 있다고 굳게 믿는 김 판사였다.
AI 보다 나은 재판, 기회는 있다
김 판사는 엎드려 있던 책상 위에서 침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판결문 초고 파일의 커서는 피고인 인적사항 기재란에 멈춰 있다. 아마도 피고인 주소를 도로명 주소에 맞게 고치다가 지쳐 잠깐 잠이 들었나보다. 전자기록뷰어나 법관통합시스템을 둘러보아도 헤이로봇이나 해맑게 웃고 있는 해태 같은 건 전혀 없었다. 모니터 한켠에 띄워 둔 법원 인터넷 내부망 화면에는 ‘인간 판사와 답 같았다. 시간 아끼는 AI 판사 나올까’라는 제목으로 최근 보도된 한 일간지 기사가 떠 있었다.
‘판결문 초고 작성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바탕화면 우측 하단 시계는 2023년 9월 어느 평일 밤 9시를 가리키고 있고, 알리미메신저 창에는 아직 로그아웃하지 못한 무수한 사용자들의 불빛이 점멸하고 있었다. 김 판사는 랜선 너머에서, 아직도 열심히 기록을 직접 읽고 종합법률정보과 판결문검색시스템에서 참조사례를 찾아 누비며 더 나은 재판을 위해 고심하고 있을 무수한 법관들에게 강한 동료애를 느끼며, 크게 심호흡을 하고 맹렬히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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