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필객 2] "라때'는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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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06

낭만필객Ⅱ
글 오기두 부장판사(인천지방법원)

“라때”는 말이야~!!
“내 사무실에 있는 침대에 얽힌 얘기를 하려고 해. 듣기 싫어도 그냥 들어봐아. 들어주는 것도 적선(積善)이라고 했어.”

20년 전 고등법원 우배석 판사로 부패 형사사건을 전담했던 거야
흠, 그러니까 그 때가 지금으로부터 한 20년 전은 된 때의 일이지? 고등법원 형사항소 부패전담부 배석판사를 하던 시절이었어. 부패사건이라 말만 무성하잖아? 돈(뇌물) 받고 돈 준 거 누가 흔적을 남겨 가며 주겠어? 뇌물 주는 사람 중 어느 누가 계좌추적하게 은행계좌로 이체하겠냐고? 현찰로, 캐쉬(cash)로 주었겠지? 그 때는 오만 원 권이 나오기 전이었지. 1억 원의 뇌물을 주려는 사람은 어떻게 주었는지 알아? 배춧잎 빛깔로 된 만 원짜리를 골프백 하나에 가득 담아 주면 그게 1억 원은 되던 시절이었지. 그걸 검증한다며 법정에서 저울에 달아 본 적도 있었지(11kg 정도 됨). 그저 검찰 측 증인(대개 이른바 업자)의 뇌물 주었다는 말과 피고인(대개 이른바 고위 공직자)의 펄쩍 뛰며 그런 적 없다는 말만 잔뜩 있었지. 그 무성한 말들은 무슨 피의자신문조서니 참고인진술조서니 하는 수사기록으로 변하여 증거서류로 법원에 제출되기 마련이지.
뇌물 사건 심리한다는 것이 돈을 주고 받았는지 만 심리해야 하는 데 그치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뇌물이 오고 간 정황에 대해 깊은 지식을 습득해야만 피고인이나 증인 말의 신빙성을 판단할 수 있지 않겠어? 정황이나 간접사실을 모아 보아야 그것들과 일치하는 말은 믿을 만하고, 그것들과 배치되는 말은 못 믿겠다고 판단해야 하니까. 그리고 요새 세상 얼마나 복잡해졌나?
각계각층의 전문가 집단이 얼마나 많으냐고?
요새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35,000달러 시대야. 이토록 경제규모가 커지는 한참인 와중에 나는 고등법원 우배석 판사로 부패 형사사건을 전담했던 거야. 그러니 그 돈(뇌물)이 오가는 과정도 각 분화되고 전문화된 각 직역별로 이루어지니 얼마나 복잡했겠냐고?
대단위 산업단지 개발 사업이 그렇고, 대도시 정비계획이 그렇고, 대규모 철도건설 사업이 그렇고, 독점기업인 수자원공사 업무가 그렇고. 뇌물 주었다는 업자나 뇌물 받지 않았다고 펄쩍 뛰는 피고인 공직자나 전부 한다 하는 전문가들이야. 그 각 분야 전문지식과 배경을 이해 해야만 돈 주었다는 자나 받지 않았다는 자들의 말 중 누구 말이 옳은지를 판단할 수 있는 거야.

부장님, 배석판사들과 합의하는 거 엄청 좋아 하셨어
게다가 내가 그 때(라때)는 배석판사였잖아. 하늘 같은 부장판사님을 모셔야 할 때였어. 나때는 그랬어. 뇌물 주었다는 사람이나 받지 않았다는 사람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많은 수사기록과 공판정에서 뱉어내는 그 많은 말이 담긴 증거기록들을 다 읽어 내야 했어. 판사실 캐비넷이 사건 기록으로 꽉꽉 찬 건 말할 것도 없고, 판사실 온 방이 사건 기록으로 가득 찼지. 과장이 심하다고? 나때는 다 그랬어~~.
우리 부장님, 배석판사들과 합의하는 거 엄청 좋아 하셨어. 배석판사들 데리고 저기 머나먼 어느 시골 높은 산에 등산가는 것도 엄청 좋아 하셨어. 일하느라 체력이 바닥인 배석판사들 높은 산에서 헥헥거리며 겨우 따라 올라가는데도 부장님 혼자서 힘차게 앞장서 등산하는 거 아주 좋아 하셨어. 특히 우리 부장님, 배석판사들과 저녁을 같이 먹는 거 정말 좋아 하셨어. 응, 나때는 그랬어. 어, 특히 우리 부장님, 배석판사들과 법원 근처에 있는 칼국수집에 가서 바지락칼국수로 저녁 먹는 거 아주 좋아 하셨어. 어. 맞아. 우리 부장님, 배석판사들은 칼국수와 바지락을 골라 내느라 땀을 뻘뻘 흘리며 버벅대고 있을 때 능숙하게 칼국수와 바지락을 분리해 내시며 흐뭇하게 칼국수를 삼키시는 거 아주 좋아 하셨어~. 그렇게 저녁 먹고 다시 판사실에 들어와 배석판사들과 합의하는 거 엄청 좋아 하셨어. 정말 좋아 하셨어. 신건 합의하는 거 참 좋아 하셨어. 배석판사들이 신건 메모해 드리고, 쟁점 정리해 드리는 거 엄청 좋아 하셨어. 나때는 다 그랬어. 속행기일 합의하는 거 엄청 좋아 하셨어. 이번 주 공판기일에서 재판장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정리해 드리는 거 아주 좋아 하셨어. 복잡한 사건 공판기일이 5회, 6회, --- 10회, -- 20회 늘어질 때 매 기일마다 속행합의하는 거 아주 좋아 하셨어.
그 많은 사건 기록 부지런히 읽고 이를 요약정리하여 가져다 주는 거 아주 좋아 하셨어. 나때는 그랬어. 다 그랬어. 선고합의는 안 했냐고? 당근 했지이~~!! 우리 부장님, 이렇게 매일 저녁 먹고 20:00경 부장판사실에 배석판사들 불러들여 합의하는 거 아주 좋아 하셨어. 부족한 배석판사 일깨우시느라 정말 고생 많이 하셨어.
아, 근데 말이지. 이런 부장님을 잘 모셔야 한다고 생각했어. 흠, 나때는 다 그랬어. 근데 그게 잘 안 되더라구우. 읽어내야 할 증거기록이 너무 많았어. 연구해야 할 법리가 너무 많았어. 부장님께서 법원도서실에서 손수 찾아다 주신 참고서적 논문들 수십 편을 다 읽고 정리하기가 너무 힘들었어. 시간이 부족했지. 월요일 저녁에 합의해야 했어. 화요일 저녁에도 합의했지. 수요일에도, 목요일에도 합의했고, 당연히 금요일 저녁에도 합의했지. 아, 물론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도 합의를 했어. 나때는 그랬어. 이렇게 월화수목금금금을 일해도 도저히 부장님을 만족스럽게 할 만큼 제대로 된 합의를 못 하겠는 거야.
하루는 부장님과 합의를 하는 중이었는데, 그 장면을 한 번 상상해 봐. 부장판사실에 부장님과 나와 또 좌배석 판사님이 탁자를 마주하고 앉아 합의를 하는 거야. 부장님의 독특한 그 음성 톤을 생각해 봐. 얼굴이 벌개 가지고 사건 기록 곳곳에 숨어 있는 쟁점과 법리를 속사포처럼 쏘아대며 공격하는 부장님을 상상해 봐. 그 앞에 숨죽이고 있는 가엾은 배석판사를 상상해 봐. 고양이 앞의 한 마리 쥐 같았겠지? 참고로 중국말로 쥐는 老鼠(라오슈우)라고 한대. 늙은 쥐(老的鼠)가 아니래도, 즉 젊은 쥐라도 老鼠(라오슈우)라고 한대. 나 요즘 점심시간에 zoom으로 중국어 배운 지 곧 3년이 돼 가거든.

피고인이 자주 가던 맥줏집 이름이 왜 헤라였지요?
부장님이 이렇게 내게 물으셨어. 당시 인천시장님이 피고인이었던 뇌물사건을 합의하던 중이었어. 내가 지금 인천법원에 근무하고 있으니 그 인연도 질기다고 할 수 있겠지? 부장님이 물으신 말이 이거야. “오 판사, 피고인이 자주 가던 그 맥줏집이 어디였지요?”, “아, 부장님, 헤라 맥줏집입니다.”, “그래요? 그 맥줏집 이름이 왜 헤라인지 알아요?”, 난 부장님의 이 물음에 답변을 하지 못했어. 너무 당황했어. 내가 이렇게 사건기록을 제대로 읽지 못했단 말인가? 당시 인천시장님이 자주 가서 그 업자를 만난 맥줏집 이름이 왜 헤라였을까? 부장님은 기록 어느 부분에서 그 답을 찾으신 걸까? 엄청 충격을 먹었지. 이렇게 충격을 받으니, 어. 이거 봐라? 내 왼쪽 다리에 쥐가 나기 시작하는 거야. 으아. 왼쪽 무릎과 장딴지가 굳어 가는 거야. 도저히 이렇게 해서는 안 될 거 같았어. 가까스로 부장님과의 그 당혹스런 합의를 어찌어찌 마쳤지.
그런데 그 후로 아무리 사건기록을 뒤져 봐도 당시 피고인이 자주 가던 맥줏집 이름이 왜 “헤라”였는지는 못 찾겠더라고. 나는 그 이후로 “헤라”를 연구하는데 날밤을 지새웠어. 그리스로마신화집도 다 찾아보고, 길거리를 걷다가 “헤라”라는 이름을 쓴 미용실만 봐도 가게 주인을 찾아가 물었어. 왜 가게 이름을 “헤라”라고 지었지요? 변덕스럽고 흉포한 제우스의 아내, 남편 못지 않게 질투심 많은 괴물 여신이 헤라인 건 알지? 제우스와 헤라가 친오빠 친여동생 사이였다가 부부 사이로 된 것도 알고 있지?

집으로 퇴근하거나 집에서 출근하기를 그만뒀어
이런 일도 있었지. 그 날은 일요일이라 조금 늦게 사무실에 출근했지. 그 때 서울 교대역에서 전철을 내려서 서초동 법원청사까지 걸어 가는 길이었어. 근데 갑자기 내 뇌리에서 보병의 노래가 계속해서 들려오는 거야.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사나이 ~~” 그러다 문득 내 눈앞에 전봇대가 나타났지. 나는 피하지 못하고 이마를 부딪쳤어. 이마가 찢어졌지. 피도 좀 났어. 나는 졸면서 걷고 있었던 거야. 고등법원 형사재판하다 보니 나는 걸으면서도 졸렸던 거지. 나때는 그랬어. 다 그랬을걸?
그 때 나는 결심했지. 이렇게 일해서는 안 된다. 지금처럼 법원과 집을 출퇴근하면서 왔다 갔다 하면 도저히 일할 시간을 확보할 수 없다. 출퇴근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무언가 획기적인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인터넷을 뒤졌지. 결국, 드디어, 중고로, 당시 9만 원을 주고 지금 이 라꾸라꾸 간이침대를 산 거야. 그 때 파는 사람이 자기 차 트렁크에 이 침대를 싣고 법원까지 와서 내게 건네 주었지. 나는 9만 원을 현찰로 주었고. 이 침대, 이거 아주 좋은 물건이야. 전기장판 기능도 있어. 겨울밤에도 사무실에서 잘 수 있었지. 이 침대가 있으니 사무실에서 아무리 늦게까지 일해도 걱정할 거 없어. 피곤하면 잠시 누워 눈을 붙이고 쉬면 되니까. 그래서 나는 집으로 퇴근하거나 집에서 출근하기를 그만 뒀어. 그냥 줄곧 사무실에 있으면서 기록을 읽으며 일했어. 나때는 그랬어.
추석연휴기간에도 설연휴기간에도 나는 집으로 퇴근하지 않고 사무실에서 사건기록을 읽었어. 누가 부패했는지 판단해 보려고. Salem의 hanging judge가 될 수는 없잖아~~? 1692년경 신대륙 미국 매사추세츠 주 Salem에서 마녀재판한 판사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나때는 그랬어. 이게 그 침대야. 지금도 잘 쓰고 있어. 그 후로 나랑 20년을 법원에 같이 있어 준 침대야. 하나 사지 그래?

*에필로그 : 이 글을 사전검열(?)하신 어떤 동기법관이 다음 글을 보내주셔서 첨언합니다.
“나도 옛날에 고등형사배석이었는데. 나때는 안 그랬어. 부장님이 기록을 안 보는 분이라 배석판사에게 물어 볼 말이 없으셨나 봐. 나도 기록 대충 봤으니 서로 할 말이 없었던 거야. 나때는 그랬어.” ( ^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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