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세상 X 낭만필객] 사부작(창원지방법원 서각동호회), 글을 그립니다

테마가 있는 글

2024.06.08

글 정현우 참여관(창원지방법원)

“처음 시작이 어렵죠! 막상 시작하면 쉬워요. 암요 암요 ^^” 발로 찾아간 첫날, 회장님의 손에 끌려 간 별관에서 마음의 준비도 없이 홀리듯 시작한지 8개월이 지났다. 처음 잡은 도구에 전해지는 손 떨림이 그대로 새겨지는 통에 삐뚤한 글들을 보며 한숨짓는 것도 잠시, 생각했던 색감을 내지 못해 덧칠하기를 몇 번인지. 그렇게 겨우 작은 거 하나 만들어 놓고는 넋 놓고 앉아 있는 나 자신을 보며 참, 생각이 많아지는 요즘이다.

나에게 잠시 멈춤의 시간을 갖게 하다
2023년 3월. 어느 날 새벽 6시쯤 천근 같은 몸을 깨워 마주 선 화장실 거울 앞엔 무엇엔가 잔뜩 화가나 폭발할 듯한 또 다른 나란 놈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주말을 지나 코밑, 턱밑으로 잔뜩 거칠게 오른 수염을 만지며 ‘이놈의 수염을 확!!’ 그러다 날카로운 면도날에 피 맛을 보았다. 그날따라 출근하기가 너무 싫어 온몸으로 핑곗거리를 찾았다. 땅 밑으로 꺼질 듯 무겁게 내리누르는 마음을 감당하기 힘든 그런 아침이었다. 그렇게 출근한 주차장에서 갑자기 찾아온 심한 통증은 나에게 잠시 멈춤의 시간을 가지게 만들었다. 월! 한참 봄기운이 오르는 솟음의 기운이 시작될 즈음, 반 100년에 들어선 나는 몸을 챙기고 나를 돌보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그 시간은 내게 너무나 소중하고 감사한 꼭 필요한 시간이었지만, 그땐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고 있는데. 내가 왜!’ 그런 생각으로 세상과 나에게 원망의 화살을 끝도 없이 쏘아대고 있었다. 무엇보다 직장에서 ‘하고 싶고 해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것을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이 억울하고 화가 났는지도 모른다.

‘나를 위해 뭔가 해야겠다’는 격렬한 가슴 떨림
3월 마지막 주를 서울 아산병원에서 보낸 후 퇴원하고 내려오는 길. 병원에서 생각했던 세상과는 달리 돌아와 본 세상은 어이없게도 더없이 활기찼다. 차창으로 스쳐 가는 벚꽃의 흩날림에 행복해하는 사람들. 그사이 설레는 봄바람에 풍성해 진 푸르른 산. 모든 것이 시간이 흘러가는 순리대로 세상은 참 잘도 흘러가고 있었다. 병원에서 나의 시간은 멈춰 있었지만, 세상은 제시간에 맞춰 계속 숨 쉬고 있었다. ‘어, 내가 없어도 세상은 참, 잘 돌아가는구나.’ 그 때서야 알았다. 꼭 내가 하지 않아도 내가 고집부리지 않아도 일어나야 할 일들은 일어나고, 이뤄져야 하는 일들은 이뤄진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욕심을 내가 너무 움켜잡고 있었고 그 속에 나를 가둬 놓고 채찍질하고 있었구나하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게 아프고 나서야 알았다. 그렇게 뭔가 크게 깨달은 듯 격렬한 가슴 떨림을 맛보고 피곤했는지 집에 도착해서 기어들어 간 침대에서 깨어난 것은 꼬박 하루가 지난 오후였다. 없이 침대 끝에 걸터앉은 나, 전날에 그 신선한 떨림은 간데없고 다시 이전의 나로 돌아와 있는 듯했다. 걸어야 했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는 끊임없이 꼬리를 무는 질문과 생각에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엷게 깔린 구름에 갇힌 태양을 품은 숨 막히는 그날 하늘이 딱 내 맘이었다. 며칠을 걸었는지 모른다. 사람 속에서도 걷고, 산속에서도 걷고, 혼자서도 걷고 그렇게 걷는 동안 끝날 것 같지 않던 터널의 끝은 보였다. 걷다 지쳐 헐떡이는 나에게 시원한 그늘을 내어 준 5월의 느티나무 아래서 ‘내가 하고 싶은 뭔가를 해야겠다. 나를 위해’ 난, 나무를 참 좋아했다. 지금도 나무를 좋아한다. 땅에 깊이 뿌리박고 머리 위로 푸른 그늘을 내어주는 숨 쉬는 나무도 좋아하고, 생명을 다한 나무에서 세월의 흔적을 나이테로 보여주며 뿜어내는 텁텁한 나무 냄새도 좋아한다. 어릴 때 먼발치에서 3, 4월의 변해가는 산을 바라보는 것을 참 좋아했다. 산 곳곳으로 번져가는 연둣빛을 좋아했다. 어린 새순들이 모여 투명한 연둣빛을 발하다 4월 어느 날 한 차례 쏟아진 봄비에 거대한 연둣빛 모자를 쓴 듯 풍성해진 그때 그 산의 나무를 제일 좋아했다.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알리는 나무. 그 나무에 글을 새기고 싶어졌다.

서각동호회에서 캘리그래피를 배우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 7월에 복직을 하고, 서각동호회 ‘사부작’을 알았다. 사부작사부작하다보면 참 쉬울 거라는 회장님의 말씀은 나에겐 거짓부렁이었다. 그래도 나무를 열심히 파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는 말은 참말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좋을 거라는 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인터넷에서 좋은 글귀 하나 출력해 오라는 회장님의 말을 보기 좋게 무시하고 간 첫날. ‘그래 본인의 필체로 새겨야 온전한 내 작품이지. 암만’하는 생각으로 호기롭게 나무에 ‘오늘 하루 감사해’를 쓰고 시작한 지 반년 만에 간신히 부끄러운 완성본을 하나 던져 놓고는 선생님께 혼쭐 난 초등학생마냥 어찌할지 몰라 멍하니 손을 놓은 지 여러 달이 지났다. ‘평생 서각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했던 마음은 변함이 없는데 쉬 손이 나가지 않으니 참 난감하기 짝이 없고, 내 맘을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글을 쓰고 내가 쓴 글로 나무에 새기는 서각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니 서각을 놓은 것은 아니다. 잠시 쉬어갈 뿐. 누군가는 ‘겨우 하나 해 놓고?’ 하겠지만 그거야 뭐 사람 나름 아닌가! ^^:; 하튼 지금은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캘리그래피를 배우고 있다. 서각동호회 사부작 안에 캘리그래피반을 개설하고 3개월째 선생님을 모시고 수업을 이어가고 있다. 서각을 하는 분들은 대체로 본인의 글씨체로 서각을 하신다. 물론 서각을 글로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본질은 글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리 생각한다. 본인의 글씨체로 서각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은 서각을 하는 사람들에겐 너무도 당연한 마음이다. 단지, 글 쓰는 실력이 안 돼서 그리 못하는 것일 뿐. 그런 마음을 알기에 서각회원들에게 캘리그래피 수업은 서예보다는 짧은 시간과 노력으로 성과물을 낼 수 있을 것 같아 호응이 좋았다. 물론, 단순히 캘리그래피만 좋아서 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그거야 뭐 개인 취향이라 존중한다.

오늘도 글을 열심히 그리다
3개월 기초반 수업이 끝나간다. 중급반(?)도 당연히 신청할 예정이다. 서예도 캘리그래피도 서각도 글은 쓴다라고 표현하기보단 글을 그린다는 표현이 맞겠다는 생각이 든다. 선생님 필체를 필사하는 것이 좀처럼 쉽지 않았는데. 요즘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얼핏 보면 선생님 필체가 보일 정도로까지는 그린다. 일주일에 하루 점심시간을 이용한 수업으로 얼마나 실력이 늘까 싶지만, 수업시간에 스킬을 배우고 수업 외에 각자 꾸준히 연습하니 수강 동기들 실력이 눈에 띄게 나아지는 듯하다. 연습장과 붓 그리고 선생님의 체본만 있으면 장소와 시간에 구애됨이 없이 어디에서든 가능하니 접근성이 너무 좋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서각을 조금 뒤로 미루어 두었다. 내가 좋아하는 옹이와 굵은 생명선이 있는 은은한 나무향과 결이 좋은 고운 나무판에 내가 그린 글을 곱게 그려 넣어 서각도로 조심히 새긴 후 4월의 투명한 연둣빛을 입혀 곱게 포장해서 내게 너무도 고마운 사람에게 선물하고 싶은 작은 목표가 생겼다. 그때까지는 조금 미루어 두리라. 그렇게 서각에 대한 미안한 마음의 짐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날을 위해 오늘도 글을 열심히 그리고 있다.

에필로그
2023년 3월의 봄, 3개월의 쉼은 내 삶의 전환점이다. 앞만 바라보며 하나의 길만 있다고 생각하던 나에게 인생길을 걷다 보면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도 만날 수 있고 그러다 헤어짐도 있으며, 하늘 위로 뻗은 나뭇가지처럼 수많은 샛길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만을 위해 쉬는 시간도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50 즈음에 맞이한 갑작스러운 몸의 병은 내가 알지 못했던 내 마음의 병을 치료해 주는 계기가 된 것 같아 지금은 너무도 감사하다. 그 몸의 병을 치유하는 동안 곁을 지켜준 가족들에게 너무도 감사하고 몸의 병의 근원이었던 마음의 병을 헤아리고 다독이며 보다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따스한 위로로 그리고 때로는 매서운 지적질로(^^) 이끌어 준 동갑내기 친구에게 너무도 감사하다. 세상에는 감사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다. 여태 그걸 모르고 살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그 감사함을 알게 되어 너무 다행이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부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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