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정연 실무관(대전지방법원)
몇 년 전 겪었던 일이다. 운이 좋게도 긴 휴정 기간을 맞게 되어 해외여행을 갈 기회가 생겼다. 영국 런던에서 시작하여 벨기에 브뤼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이어지는 6박 7일 간의 여행 일정이었다. 이 글은 그중 벨기에 브뤼셀에 도착하던 날에 관한 이야기이다.
런던에서 브뤼셀로 이동하는 유로스타 열차의 출발 시각은 오전 8시 30분이었다. 30분 전에 역에 도착하면 충분히 여유롭게 승차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홀가분한 마음과 함께 8시쯤 런던 중앙역에 도착했다. 그리고는 좌절했다. 과거 유럽 대륙을 여행할 당시 열차를 이용한 경험에 의하면, 나라 간 이동 시 별다른 검색이나 검문 절차가 없었다. 당연하게도 승차권만 제시하면 열차에 탑승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중앙역으로 들어서는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역 안에는 여권 검사를 위한 줄이 길게 늘어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지금 줄을 선다 한들 도저히 30분 안에 검사를 마치고 열차에 탑승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건 최선책이 아니다. 줄 옆에 서 있던 역무원에게 말도 안 되는 영어와 손짓발짓을 구사하며 애원했다.
“나 열차 무조건 타야 하니까 먼저 검사해 주세요!!”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이렇게 절실하게 외치지 않았을까. 도도한 역무원은 고개를 가로젓기에 바빴지만, 나도 이판사판이었기에 벼랑 끝에 몰린 심정으로 생떼를 이어갔다. 끈질기게 매달린 지 얼마나 되었을까. 진상부리는 외국인에게 지친 역무원이 한숨과 함께 줄 옆에 쳐져 있던 라인을 들어주며 들어오라고 했다. “땡큐”를 10번은 외치지 않았을까. 나는 가까스로 여권검사를 마치고 제시간에 열차에 탑승할 수 있었다.
열차에 앉으니 비로소 긴장이 풀렸다. 아침 일찍 일어나 움직인 것도 피로의 이유가 되었으리라. 브뤼셀 도착 예정 시각은 오전 11시 30분. 3시간이면 충분히 쉴 수 있겠다 생각하며, 서둘러 눈을 붙였다. 얼마나 잤을까. 별안간 오감이 모두 각성하는 듯한 불안감과 함께 눈을 떴다. 휴대전화를 확인해 보니 오전 10시 25분이었다.
‘아직 1시간이나 더 남았네.’라는 생각도 잠시, 대부분을 알아들을 수 없는 안내방송이었지만, 그중 ‘브뤼셀’ 비스름한 단어가 귀에 얼핏 꽂혔다. 그렇다. 영국과 유럽대륙은 시차가 있었던 것이다. 대륙은 영국 섬나라보다 1시간이 빠르다.
유심(USIM)을 대륙용으로 교체하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구입한지 4년이 지난 전화기의 수명이 다 되어 오류가 난 것일까.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내 전화기는 바뀐 시차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었다.
‘뭐지? 내려야 하나?’하고 고민하는 사이, 도착 중인 역의 역명에 쓰인 ‘BRUSSEL’이라는 글자가 눈앞에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반사적으로 좌석을 박차고 나갔다. 서둘러 캐리어를 챙겨 가까스로 내리기는 했지만, 내가 맞게 내린 건지에 대한 확신이 전혀 없었다.
울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역시 방법이 되지 않는다. 조급한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면서, 벤치에 앉아 유심을 갈아 끼우고 전원을 다시 켰다. 조마조마한 몇 초의 시간. 다행히도 휴대전화에 신호가 잡혔고, 바로 구글 지도를 실행했다. 그리고 확신했다. 나는 브뤼셀에 도착해 있었다. ‘이번 여행 재밌네.’ 왠지 모를 승리감에 도취된 채로, 지하철을 타고 브뤼셀 중앙역으로 이동했다. 반대방향으로 지하철을 타서 헤맨 건 비밀.
여행 전 지도를 확인한 바로는 숙소가 브뤼셀 중앙역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숙소에 도착해서 짐을 맡기고 맛있는 점심을 먹을 생각에 살며시 마음이 들떴다.
그리고는 다리가 풀렸다. 브뤼셀 중앙역에 도착 후 숙소를 가는 길을 찾기 위해 구글 지도를 실행했는데, 먹통이다. 유심이 이상하다. 인터넷이 안 된다. 눈물이 차올랐다.
브뤼셀 한복판에 길 잃은 강아지 한 마리가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까지 대비하여 중앙역에서 숙소까지 가는 길을 표시한 지도를 출력해 왔다. 파워 “J(계획형 인간)”인 스스로를 칭찬하며 지도를 펼쳤다. 모르겠다. 난 지도를 볼 줄 모르는 사람이었나 보다. 동서남북이 어디인지도 종잡을 수도 없었다. 난생처음 서 있는 이 땅은 네까짓 게 휘젓고 다닐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비웃는 듯했다.
그때 역 앞에 게시된 커다란 지도가 보였다. 지도에는 주변의 주요 건물의 이름과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다. 안도감과 함께 가슴을 쓸어내리며 지도 앞에 섰다. 모르겠다. 난 지도를 볼 줄 모르는 게 확실하다. 아무리 지도를 봐도 숙소를 찾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지도가 더 이상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판단을 하고 무작정 주변을 걸어보기로 했다. 방향감각도 없이 브뤼셀 중앙역을 중심으로 하염없이 걸었다.
왕궁, 공원, 미술관, 성당, 오줌싸개 동상 등 가고 싶던 곳들이 역 주변에 모두 있었다. 미술관 입구에 새겨진 “벨기에 왕립 미술관”이라는 한글이 사무치게 반가웠다. 대성당의 화려하고 장엄한 외관을 마주하고서야 비로소 여행을 왔음을 실감하였다. 공원에서 한가로이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조금씩 내 마음에도 여유가 들기 시작했다.
착각이었다. 캐리어를 쥔 손이 저리고 두 다리가 무겁다 생각될 때쯤, 이미 같은 곳을 맴돈 지 1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진심으로 울고 싶어졌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던가. 마침, 저 멀리서 나를 향해 다가오는 두 명의 동양인이 보였다. 신기하게도 한국인은 외국에 나가면 기가 막히게 한국인을 알아본다. 그리고 그 두 명은 누가 보아도 한국인이었다.
누가 나를 “I(내향형 인간)”라고 했던가. 두 명과 가까워지자마자 눈을 마주치며 외쳤다. “한국분이신가요? 제발 도와주세요!”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이렇게 불쌍하게 외치지 않았을까. 신기하게도 한국인은 외국에 나가면 곤경에 처한 한국인을 진심으로 잘 도와준다. 그분들도 그랬다. 자신들의 휴대전화로 구글 지도를 실행하고 호텔의 위치를 찾아주었다. 너무나도 가까운 호텔의 위치를 보고는 내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감사합니다”를 20번은 외치지 않았을까. 나는 그들을 뒤로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숙소로 향했다.
숙소에 도착하여 잠시 동안 휴식을 취하며, 1시간 넘게 브뤼셀의 거리를 걸으며 보았던 장소들을 떠올렸다. 그곳들을 조금 더 여유롭게 둘러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원래의 계획은 다음날 룩셈부르크를 당일치기로 여행할 생각이었지만, 오늘의 바보 같은 헤맴은 내일의 계획을 뒤엎자고 부추기고 있었다. 난 짧은 시간 동안 브뤼셀에 매료되었나 보다. 그리고 다음날, 룩셈부르크를 깔끔하게 포기하고, 브뤼셀에서만 하루를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전날과 다르게 다행히도 휴대전화가 유심을 제대로 인식하여 구글 지도를 실행하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아침 일찍부터 만화센터, 악기박물관, 왕립미술관, 대성당 등 브뤼셀의 명소들을 여유롭게 둘러보며 오늘의 일정을 선택한 나 자신이 기특했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을 감상하며, 설명할 수 없는 경외감을 느꼈다. 화려한 와플, 고디바, 노이하우스, 레오니다스의 달콤한 초콜릿이 가져다주는 황홀함도 마음껏 맛보았다. 그리고 그랑플라스에서 한껏 여유를 부리는 많은 사람들을 보며, 그때만큼은 같은 자유로움을 만끽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그날은 아침부터 지독하게 운이 없고 실수 연발이었던 하루였다. 하지만 그 불운과 실수투성이가 다음날의 보물과도 같은 시간으로 이어져 아름다운 추억으로 평생 남겨질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아마도 인생도 이와 같지 않을까. 화가 나고, 짜증 나고, 슬프고, 두려운 일이 매일매일 반복되지만, 그것들도 어쩌면 받아들이기 나름인 것이고, 잘만 활용하면 행복으로 다가올 수도 있지 않을까.
속이 쓰린 민원인과의 언쟁, 끝없이 들어오는 사건기록에 파묻혀 지내는 나날에, 그날의 기억이 현재를 버틸 수 있는 밑거름이 되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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