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평소 인생이 곧 여행이라고 즐겨 말하는 이유는 인생과 여행이 서로 닮은 점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처럼, 우리는 살아가며 세상일에 불만을 가지고 좀 더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선 세상이 어떻게 변해야 할지 끊임없이 고민하며 살아간다.
정태현 작가
여러분은 왜 여행을 떠나시는지? 패기 넘치던 이십 대 후반의 젊은 시절, 넓은 세상을 경험하며 인생의 답을 찾겠다는 막연한 꿈을 안고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500일 넘는 세계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돈 대신 패기를 가지고 떠난 장기 여행이었기에 회사 휴가를 이용해 짧게 다녀오는 여행과는 달랐다. 이 나라에 가게 된다면 꼭 한번 가서 먹어봐야 한다는 유명한 식당은 비싸서 가지 못했다. 돈을 아끼기 위해 대형마트에서 산 대용량 스파게티 소스 병을 배낭에 넣고 다니며 숙소에서 직접 면을 삶아 파스타를 만들어 먹었다. 호텔에 머무는 것 역시 꿈도 꾸지 못했다. 싸구려 여행자 숙소에서 처음 만난 다른 여행자들과 한방에서 함께 자야 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삐걱거리는 침대와 사람들의 코 고는 소리에 편히 자는 건 포기해야 했지만, 대신 호텔에 머물렀다면 만나지 못했을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때 만났던 사람들 이야기를 지금처럼 필요할 때마다 하나씩 꺼내 글로 쓰며 요긴하게 쓰고 있으니, 뭐든 하나를 포기하면 대신 다른 하나를 얻는 법인 것이다.
그렇게 만난 사람 중에는 십 년 넘게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세계를 여행 중인 한국인 장기 여행자도 있었다. 사십 대 후반에서 오십 대 초반 사이로 보이는 나이에 빼빼 마른 체격, 얼굴에는 수염이 덥수룩했고, 길게 자란 손톱 밑에는 검은 때가 가득 차 있었다. 한국 사회에서는 이런 초라한 행색의 사람에게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지만, 싸구려 여행자 숙소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해가 지고 이윽고 밤이 찾아오자 여행을 마치고 싸구려 여행자 숙소로 돌아온 젊은 여행자들은 한국이란 생소한 나라에서 온 어느 나이 든 장기 여행자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눈을 반짝이며 그를 둘러싸 앉았다. 나 또한 저토록 더러운 사람이니 분명 굉장한 사람일 거라는 기대를 잔뜩 안고 많은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앉았다. 그는 이야기 시작과 동시에 자신이 지금껏 얼마나 힘들게 여행을 이어 오고 있는지 자랑스럽게 늘어놓았다. 그러면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이런 힘들고 가난한 여행이야말로 진정한 여행이고, 휴양지로 떠나 고급 호텔에서 비싼 칵테일이나 마셔대는 여행은 결코 여행이라 말할 수도 없다며 마치 호통치듯 말했다. 고급 호텔에서 그런 말을 했다면 분명 다른 반응이 있었겠지만, 싸구려 여행자 숙소에 모인 젊은 여행자들은 모두 그가 하는 말에 무릎을 탁 치며 정말 맞는 말이라며 환호했다.
이후 그가 하는 이야기는 모두 자신만이 옳고, 다른 건 모두 잘못되었다는 내용뿐이었다. 누군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하면 무작정 화를 내기도 했다. 그는 작고 사소한 일까지 꼭 옳고 그름을 따졌다. 분명 세상에는 옳고 그름을 따져야 하는 일도 있지만, 기껏해야 여행 따위에는 저마다 취향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걸까.
우리는 왜 여행을 떠나는 것일까? 억지로 끌려가야 하는 가족 여행이 아니라면 (가정을 위해 애쓰시는 모든 분들께 응원과 위로를….) ‘내가 머무는 곳에 대한 불만’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라 생각한다. 현생이 만족스럽지 않은 사람은 인도로 떠나고, 내가 머무는 곳이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유럽으로 떠난다.
반대로 현생이 만족스럽지 않다며 유럽으로 떠나기도 하고, 내가 머무는 곳이 아름답지 않다며 인도로 떠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지친 일상에 휴식이 필요한 사람이 휴양지에 있는 고급 호텔로 떠나 삶에 휴식이 필요하다는 목적을 이룬다면 그 역시 훌륭한 여행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꼭 어디로 떠나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딱히 어디도 떠나고 싶지 않다면, 어디도 가지 않고 집에서 소파에 반쯤 몸을 뉜 채 느긋하게 프로야구 경기를 보는 일 역시 휴가를 보내는 훌륭한 방법 중 하나라 생각한다.
각 개인이 저마다 다양한 개성을 지니고 있듯 각자가 지닌 불만, 그리고 그 불만을 해소하는 방법 역시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그러니 애초에 옳은 여행이란 것도, 또 모두에게 틀린 여행도 있을 수 없는 게 아닐까.
나는 장기 여행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그가 처음 여행을 떠났던 이유가 궁금해졌다. 그도 처음에는 그저 고생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지는 않았을 테다. 굳이 여행을 떠나지 않더라도 고생길은 한국에서도 얼마든지 쉽게 찾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는 너무 오랫동안 여행한 나머지, 애초 자신이 무엇을 위해 여행을 떠났는지 잊어버리고 자신의 힘들고 고생스러운 처지 자체만이 답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당시 여행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나는 그 장기 여행자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나의 여행 역시 길어지자 차츰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오랜 여행을 그만두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일은, 일상을 정리하고서 오랜 여행을 떠나는 일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장기 여행자들은 모두 대단한 용기를 가진 사람들일 거라 생각하지만, 내가 만나본 바로는 집으로 돌아갈 용기를 차마 내지 못해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아다니는 국제 미아 신세가 되어버린 장기 여행자도 꽤 있었다. 나라고 다르지 않았다. 나 역시 긴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되자 익숙한 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일이 두려웠다. 전에 내게서 이런 이야기를 들은 지인 중에는, ‘그게 무슨 소리냐. 휴가를 이용해 잠시 여행을 다녀오는 일조차 정말 힘든데 장기 여행은 더욱 힘들지 않으냐. 어째서 여행을 끝내는 일이 그토록 힘든 일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몸이 힘든 일은 뭐든 한 달만 지나면 곧 적응이 된다. 그렇게 여행자의 생활이 몸에 익숙해지면 그때부터는 꽤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다. 나를 두고 이러쿵저러쿵하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뿐 아니라 그 어느 나라에도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잣대를 들이 내밀며 평가하려는 사람들은 있지만, 그들도 외국인 여행자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어도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그냥 넘어간다.
하지만 그게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내가 남들 눈에 어떻게 비치는지 알 수 없다면 자기만의 세계에 갇히기 쉽기 때문이다. 여행이 길어질수록 여행이 시야를 넓혀 준다는 막연한 이야기를 그대로 믿고서 자만에 빠질 위험도 크다. 더구나 싸구려 여행자 숙소에서는 권위까지 얻으니….
여행을 오래 한다고 더 나은 인간이 되는 건 아닌 것이다. 그건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가 평소 인생이 곧 여행이라고 즐겨 말하는 이유는 인생과 여행이 서로 닮은 점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처럼, 우리는 살아가며 세상일에 불만을 가지고 좀 더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선 세상이 어떻게 변해야 할지 끊임없이 고민하며 살아간다. 그러는 가운데 이런저런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기도 하고, 이 종교 저 종교에 관심을 가져보기도 하고, 정치에 참여하기도 한다.
그러다 마음에 쏙 드는 답을 찾게 되면 답을 찾던 일을 멈추고서 그때부터는 답을 지키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아무래도 나와 같은 답을 가진 사람들하고 더 어울리게 되다 보니, 나와 다른 답을 지닌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적어진다. 더구나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의 권위 또한 높아지다 보니 쓴소리를 들을 기회는 점점 더 적어져 나중에는 누군가 자신의 말에 반대하거나 질문을 하면 무작정 화부터 내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마치 오랜 여행 끝에 자신이 곧 진리라 생각하게 된 장기 여행자처럼. 하지만 이런 모습이 과연 우리가 처음 찾으려 했던 답의 모습인 걸까? 오히려 우리는 그런 사회의 모습에 실망해 답을 찾으려 했던 건 아닐까.
지금 이런 글을 쓰고 있다고 해서 나는 뭔가 다른 사람일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작가라는 직업 특성상 섣불리 판단하고 답을 내리는 일을 늘 경계하고 있지만, 어느새 내가 가진 잣대로 이 사람은 어떻고 또 저 사람은 어떻다며 이러쿵저러쿵하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때가 종종 있다. 내게 여행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순간이다. 젊은 적에는 좀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인생의 답이라는 것을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났지만, 지금의 나는 좀 더 넓은 세상을 보며 내가 찾았다고 생각한 답들을 지워내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내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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