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뜰] 문학소년의 꿈

공감

[생각의 뜰] 문학소년의 꿈

2025.01.07

글. 이진영 대전고등법원 판사

그들과의 첫 만남의 기억은 희미한 파편으로 남아 있다. 1980년대 후반 어느 봄날 또는 무더운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들은 내가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중소도시 시내 서점의 책장에 나란히 앉아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 시절 ‘나는 누구인가?’, ‘인간은왜 살아야 하는가?’ 등의 근원적 물음에 빠져 혼자만의 고독과 사색의 시간을 보내곤 했다. 나는 그들을 책장에서 꺼내 읽으며 나의 근원적 물음과의 관계를 탐구하려 했다. 그들 속에 있는 소설의 장소, 시간, 인물 등을 머릿속으로 생각하며 상상의 나래를 폈다. 그들과의 만남은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내 인생의 일부가 되었다.

그들을 서점의 책장에서 나의 책장으로 옮겨 놓으면 작은 성취감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그들을 모으다 보니 1년에 한 번 그들의 동료가 태어날 때마다 그를 모으는 것이 하나의 취미가 되었다. 나의 책장은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있었 다. 그들은 싫어하는 햇볕을 받으며 노랗게 물들어 갔다. 노랗게 물든 그들을 보면 나의 무지에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 든다. 나는 젊은 시절 고향을 떠나 서울에 있었는데 그들은 늘 함께 있었다. 심심할 때, 지칠 때, 우울할 때, 할 일이 없을 때 그들을 책장에서 가만히 꺼내 읽으며 나만의 사색의 시간을 가졌다.

그들의 삶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사법연수원 시절 그들 중 ‘천지간’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를 잃어버린 적도 있었다. 사법연수원 동기가 그를 빌려 달라고 하여 빌려준 것 같은데 사법연수원을 수료할 때까지 그 동기의 이름을 기억할 수 없었다. 또한 싫어하는 햇볕을 너무 오래 받고,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몸이 노랗게 변해 간 그들도 있었다. 나의 결혼 후 아이들이 생기면서 아이들의 책들로 인해 책장은 더 이상 그들의 안식처가 될 수 없었다. 그들은 아늑한 거실 책장에서 쫓겨나 베란다의 박스 안에 갇혀 나의 손길을 기다리기도 하였다. 벌레를 싫어하는 나의 배우자로 인해 비닐 팩에 쌓여 냉장고에서 차디찬 겨울의 맛을 봐야만 할 때도 있었다. 그들은 집에 더 이상 머무를 곳이 없어 나의 사무실에서 세월의 무게를 견디며 나와 함께 늙어가고 있다.

그들은 1년에 한 번 연초에 이름을 달고 세상으로 나온다. 올해는 누가 그들의 이름을 지어 주었을까?

올해 그의 이름은 무엇일까? 궁금함과 기대를 안고 서점 문을 들어선다. 올해 태어난 그를 가지고 집에올 때면 빨리 그 속에 있는 소설들과 만나고 싶어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그들의 속에는 그들의 이름이된 소설과 그들의 이름이 되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작품성을 가지고 있는 소설이 있다. 그 소설들을 모두 읽고, 이 소설은 구성이 탄탄하다는 등, 이 소설은 소재가 신선하다는 등, 이 소설은 시대상을 잘 반영했 다는 등, 이 소설은 인물의 심리 묘사가 잘 되어 있다는 등 어쭙잖은 심사평을 속으로 늘어놓으며 감히 대가들의 작품들을 평가하기도 한다. 때에 따라서는 올해 그들의 이름은 이것이 아닌 저것이 되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등 남몰래 심사위원이 되기도 한다.

그들의 친구들은 동인문학상, 이효석문학상, 황순원문학상, 현대문학상, 젊은 작가상 등이 있다.

2020년에는 저작권 문제로 수상을 거부하는 사태가 발생하여 그들의 친구가 태어나지 못하였다. 이상문학상 규정에는 대상 작품의 저작권을 작가에서 출판사로 이전하고, 대상 작품을 3년 동안 수상 작가 자신의 작품집에 수록할 수 없고, 대상 수상작의 서명을 작가 자신의 작품집에 쓸 수 없는 독소 조항이 있었다. 수상 거부 사태로 그러한 독소 조항의 문제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때 나는 수집 활동을 그만두어야 하나 고민해 보기도 하였다. 독소 조항이 일부 개정되고 2021년 이후 다시 그들의 친구들이 태어났지만 이상문학상의 공신력은 상당한 타격을 받게 되었고, 나의 열정도 많이 식게 되었다.

서울의 달빛 0장, 잔인한 도시, 저녁의 게임, 관계, 엄마의 말뚝 2, 깊고 푸른 밤, 먼 그대, 어두운 기억의 저편,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흐르는 북,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붉은 방, 해변의 길손, 겨울의 환, 마음의 감옥, 우리시대의 소설가, 숨은 꽃, 얼음의 도가니, 하나코는 없다, 하얀 배, 천지간, 사랑의 예감, 아내의 상자, 내 마음의 옥탑방, 시인의 별, 부석사, 뱀장어 스튜, 바다와 나비, 화장, 몽고반점, 밤이여 나뉘어라, 천사는 여기 머문다, 사랑을 믿다,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 아침의 문, 맨발로 글목을 돌다, 옥수수와 나, 침묵의 미래, 몬순, 뿌리 이야기, 천국의 문, 풍경소리,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 마음의 부력, 불장난, 홈 스위트 홈, 일러두기. 이것이 지금까지 붙여진 그들의 이름이다. 신비감을 주는 이름도 있고, 평범한 이름도 있다. 소설가들의 이름 짓기에 감탄하기도 한다.

48편의 대상작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은 이청준 작가님의 ‘잔인한 도시’다. 교도소를 나온 노인은 교도소 근처 공원에 있는 가게에서 새를 사서 날리며 아들을 기다린다. 공원에서 동전을 주워 새를 사서 날리며 노숙 생활을 하던 중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가게 주인은 새의 날개에 상처를 내서 멀리 날지 못하게 하고 밤에 공원의 나무에 앉아 있는 새를 다시 잡아 다음 날 손님들에게 팔고 있었다. 주인이 새를 잡고 있는 광경을 목격한 후 노인은 새를 사서 새와 함께 집으로 향한다. 인류가 만들어 놓은 도시라는 공간에서 매일 출퇴근을 반복하는 우리가 새장의 새가 아닐까? 우리가 멀리 도망가지 못하도록 권력을 이용한 폭력으로 우리의 날개를 꺾어 놓았던 것은 아닐까? 어린 시절 문학소년이 되고 싶었던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작품이었다.

그들의 이름이 된 소설은 아니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은 성석제 작가님의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이다. 100미터 다리에서 자동차가 추락하는 데 4.5초가 걸린다.

주인공은 자신이 야비한 수법 으로 조직을 완성했다는 소문을 낸 청카바에게 가기 위해 그의 애인 청바지를 태우고 자동차를 몰던중 4년 전 완성된 다리 위에서 추락한다. 다리에서 떨어지는 그 짧은 순간 주인공이 어린 시절 장화를 빼앗아 찢어 버린 일, 중학교 시절 동네 깡패가 경찰에게 잡혀가는 것을 목격한 일, 장례식장에서 술을 마시다 고향 친구의 팔을 칼로 그은 일, 청카바와 그의 애인 청바지의 사연 등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다. 성석제 작가님은 법학과를 나와서 그런지 감성 또는 코드가 나에게 잘 맞는다. 이 소설은 장면의 설정, 자동차가 떨어지는 순간의 묘사 등이 매우 뛰어난 작품이다. 내 인생이 지금으로부터 4.5초만 남았 다면 나는 무엇을 할까? 내가 자동차를 몰다 다리에서 떨어진다면 그 짧은 순간 무슨 생각을 할까? 우리 인생의 덧없음도 느끼게 해 주는 소설이다.

그들의 이름 중에는 노벨문학상을 받으신 한강 작가님의 ‘몽고반점’도 있다. 한강 작가님의 아버지인 한승원 작가님은 ‘해변의 길손’이라는 소설로 대상을 수상하여 부녀 모두가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하 였다.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으로 이어지는 연작소설 중 두 번째 소설이다. 한강 작가님의 채식주의자라는 책에 수록되어 있어 많이들 읽어 보셨을 것이다. 고기 먹기를 거부하는 처제의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처제의 몽고반점을 보기 위해 예술혼을 불태우는 주인공의 이야 기이다. 현실적 조건과 경계를 넘어 절대미를 추구하는 작품이다. 소설은 소설 그 자체로 하나의 완성된 예술 작품이다. 소설을 자기 나름대로의 도덕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작품을 난도질하는 폭력은 사라 졌으면 한다.

요절한 천재 작가 이상이 남긴 문학적 업적을 기리는 이 상에 가장 어울리는 작품은 최수철 작가님의 ‘얼음의 도가니’이다. 제목부터 모순이다. 이 소설을 읽고 나면 머리가 더 복잡하고 혼란해진다. ‘쩡’ 빙산이 두 쪽으로 갈라지는 소리로 끝나는 소설의 마지막을 읽고 나면 나의 머리가 혼돈으로 ‘쩡’하고 갈라지는 기분이 든다. ‘나는 나를 용서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지고 그에 대한 대답은 없다. 천재 작가 이상의 날개를 읽는 기분이다. 내 정신을 몽환의 세계로 이끈다. 평론가들은 이 작품을 포스트모더 니즘 소설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들 속에 있는 300여 편의 소설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색깔을 가지고 나를 유혹하고 있다. 봄의 화려 함, 인생의 고독, 끊임없는 삶의 부조리에 대한 몸부림, 관계에 대한 고민과 갈등, 사회 부조리의 폭로, 글쓰기의 어려움 등 많은 주제를 가지고 자신의 매력을 뽐내고 있다. 이제 문학소년의 꿈은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지만 깊은 밤 그들로 인해 나의 꿈을 추억하며 소설 속에 빠져든다.

나도 언젠가 그들과 헤어져야 한다. 나의 죽음이 그들과의 이별로 만들고 싶지는 않다. 그들을 누군가 에게 전달하거나 좋은 안식처를 마련해 주어야 할 의무감이 든다. 그들의 안식처가 어느 도서관의 따듯하고 말끔한 책장의 한 구석이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긴 밤 옛 추억을 떠올리며 따뜻한 방 안에서 소설의 매력에 빠져 지난날 꿈꿔 보았던 문학소년·소녀 시절을 회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져 보시길....

"공감" 카테고리의 다른 글

1 2 3 4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