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뜰] 나의 달리기가 누군가의 꿈을 도울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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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07

글. 채수홍 서울회생법원 실무관

지나온 거리를 알려주는 표지판은 38km. 잠실대교 한가운데였다. 서로의 호흡이 엉기고 나는 잠시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괜찮으세요? 이제 거의 다 왔어요. 힘드시면 꼭 말씀해 주셔야 해요.”

“페이스는요? 아직 5분 페이스 유지하는 거죠?”

남은 거리는 4km였다. 옆에서 들리는 호흡소리는 거칠다 못해 온몸의 힘을 다 끌어 뱉어내고 있었다. 완주를 장담하기 힘들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36km에서 메인 가이드로부터 테더(시각장애인과 가이드러너를 연결한 끈)를 이어받을 때 나는 사실 지쳐 있었다. 도쿄마라톤 대회를 완주한 지 2주밖에 지나지 않아 온몸에 피로가 남아 있었다. 이런 상태로 시각장애인 가이드러너를 하겠다고 나선 게 어쩌면 큰 무리수였다. 잠실대교의 긴 거리를 가늠하면서 서로 이렇게 힘든데 페이스를 늦춰야 하지 않을까, 애초에 그녀가 기대했던 3시간 40분 이내 완주가 불가능한 목표가 아닐까 생각했다. ‘우리 좀 천천히 갈까요?’ 나는 이 말을 계속 삼키고 있었다. 우리는 과연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까, 아니 완주할 수 있을까. ‘불 가능’이라는 암흑이 계속 머릿속을 덮어오고 있었다.

2022년 9월이었다. 10월에 있을 나의 첫 풀코스, 춘천 마라톤 대회를 한 달 앞두고 나는 연습차 공주 동아마라 톤에 참가했다. 아직 여름이 물러나지 않은 때라서 날씨는 무척 무더웠다. 워밍업을 하는데도 땀을 흠뻑 쏟았다.

하프 코스에 출전했지만 이런 날씨에 5km나 달릴 수 있을까 싶었다. 조금 달리다보니 페이스가 느린 풀코스 후발 주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 곁을 지나는데 달리기를 하며 알게 된 친구 명희가 보였다. 그리고 그의 팔이옆 사람과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순간 머리칼이 쭈뼛 솟으며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런 날씨에 시각장애인과 풀코스를 뛴다고? 쏟아지는 여름 땡볕을 가리겠다고 머리 위로 둘러쓴 얇은 손수건만큼이나 무모해 보였다. 과연 그들이 완주할 수 있을까. 보다 빠른 기록을 얻으려고 뛰는 나의 달리기와 누군가의 눈이 되어 완주를 꿈꾸는 그 친구의 달리기. 우리는 같은 공간에서 다른 달리기를 하고 있구나 싶었다. 무더운 날씨로 많은 사람들이 DNF(Did Not Finish)했고 절반도 완주하지 못한 그날의 대회에서 친구 명희와 짝꿍 시각장 애인 러너는 결국 감격스러운 완주를 해냈다. 그날의 장면이 오래도록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후로 나는 ‘마라토너’로서의 완주 말고도 ‘시각장애인 가이드러너’를 꿈꿨다. 내가 좋아 시작한 달리기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게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꿈을 이루는 디딤돌이 된다면 무척 의미가 있으리라는 바람이었다.

지난해 3월, 나는 세계 6대 마라톤의 첫 대회로 ‘도쿄마 라톤’ 참가를 앞두고 있었다. 공주마라톤에서 마주쳤던 친구 명희로부터 연락을 받은 건 그쯤이었다. 이번 서울마라톤에 참가하는 시각장애인의 목표 기록이 3시간 40분 이내 완주인데 이 기록을 위해 함께 할 가이드러 너가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소식을 듣고 손을 번쩍 들었 다. 이전까지 다섯 차례 풀코스 완주를 했던 나의 기록은 모두 3시간 30분 이내였고 도쿄마라톤을 참가하기로 하면서 3시간 10분 이내의 기록을 목표로 겨우내 연습해 왔다. 어느 모로 보나 3시간 40분 이내는 충분하리라 자신했다.

이렇게 쉽게 ‘마라토너로서의 버킷리스트’ 하나를 이룰수 있다니 하며 나는 찾아 온 행운에 설레기까지 했다.

친구에게 내가 하겠다고 이야기하고 배선애 님에게도 연락을 해서 무척 좋아했다는 소식마저 들었을 무렵, 나는 경솔했다는 생각에 후회로 휩싸였다. 3월 초 도쿄마 라톤에 참여하고 2주 후에 열리는 서울마라톤에 가이 드러너라니. 게다가 배선애 님의 목표기록은 단순한 목표가 아니었다. 3시간 40분 이내라는 기록 자체도 쉽지 않았지만 배선애 님은 4월 중순 보스턴마라톤을 앞두고 목표 점검차 나서는 대회였다. 못하면 그만, 하면 좋은 그런 목표가 아니었다. 도쿄마라톤을 달리고 나서 나의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혹은 어디 부상이라도 입게 된다면? 나 혼자 달리다가 포기하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의 목표가 나 때문에 무산될 수도 있었다.

며칠을 고민하다 이제라도 못한다고 해야겠다는 생각에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명희야, 내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번 가이드러너는 욕심인 거 같아. 도쿄마라톤 나가고 2주 후에 달리는 건데, 몸 상태가 어떨지 모르고. 내 생각이 좀 짧았나봐. 미안 해서 어쩌지?”

내 얘기를 듣고 난 친구의 반응은 의외였다.

“아냐, 너 말고도 두 명의 가이드러너가 또 있고 넌 서브 라서 만약에 달리다가 몸이 안 좋으면 빠져도 돼. 함께 한다고 나서 준 것만으로도 너무 좋아하셔.”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나는 3월 서울마라톤에 시각장애인 가이드러너로 출발선에 서게 되었다.

시각장애인의 풀코스 마라톤은 정말 출발조차 쉽지 않았다. 출발 전 만난 배선애 님은 배번을 거꾸로 달고 나타났다. 배번을 고쳐달아 주고 짐을 맡긴 후에 화장실에 다녀와야 했다. 이게 큰 문제였다. 배선애 님은 여자였고 가이드러너 셋은 모두 남자였다. 우리는 배선애 님을 여자화장실에 모셔다 드리고 문 앞에 서서 기다린 후에 다시 돌아가며 남자화장실에 다녀왔다. 출발선에 이동하 기도 전에 나는 이미 진이 다 빠져버렸다.

드디어 출발.

목표기록 3시간 40분 이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1km 당 5분 10초 정도를 달려야 했다. 앞에 선 두 명의 보조 가이드러너는 달리는 도로의 상태를 알려준다. ‘울퉁불 퉁! 전방에 맨홀! 50미터 앞에서 우회전!’, 뒤따라오는 메인 가이드러너와 시각장애인 러너에게 물도 전달한다. 먼저 빠르게 달려가서 내 목을 축이고 다시 두 손에 물을 들고 흘리지 않게 뛰어가서 전해준다.

“죄송합니다. 지나갈게요. 시각장애인 팀이에요. 조심해 주세요. 고맙습니다.”

수도 없이 외쳐가며 다른 러너들로부터 시각장애인 러너를 보호하고 조심하도록 알려주는 것도 우리 몫이다. 시각장애인과 가이드러너는 마라톤 레이스 중에 119 앰뷸런스와 같았다. 이해해 주고 배려해 주신 러너들 사이로 길이 열리는 감동적인 모습이 내내 계속됐다. 광화문에서 출발을 하고 을지로, 청계 천을 지나 종로에 이르는 20km까지 우리는 순조로웠다. 배선애 님은 생각보다 컨디션이 좋아 5분 10초 페이스보다도 더 빠른 페이스를 자꾸 요구했다. 우리는 후반부에 더 힘을 내자며 다독 였다. 목표는 쉽게 달성할 것처럼 보였다.

군자역을 지나 어린이 대공원에 이를 때쯤이었다. 거리는 30km, 내내 잘 뛰던 메인 가이드러너가 돌연 우리를 불렀다.

“저, 테더 좀 받아주세요. 제가 원래 아킬레스건 부상이 있었는데 더 못 달릴 것 같아요.”

“네, 제가 받을게요.”

나와 나란히 달리던 가이드러너가 메인 자리로 옮겼다. 심정이 복잡했다. 내가 먼저 포기한다고 말했어야 했는데 싶었다. 도쿄마라톤의 여파가 크게 밀려올 때였다. 다리는 무거웠고 좀체 앞으로 나아가지지 않았다. 남은 거리가 12km라는 것은 더욱 절망적이었다. 이걸 다 어떻게 뛰지? 어디쯤에서 포기한다고 해야 할까. 도로에 나온 사람들의 응원이 귀에 닿지 않을 만큼 힘이 들었다.

36km였다.

더 뛸 힘도 없었다. 혼자 뛰는 것보다 2배의 에너지가 드는 일이란 걸 이쯤 와서야 깨달았다. 그때였 다. 테더를 이어받아 달리던 다른 보조 가이드러너가 나를 보며 말했다.

“수홍 님, 혹시 이 끈 받아주실 수 있으 세요? 제가 너무 힘드네요.”

할 수 있다 없다를 말하기도 전에 배선애 님과 엮은 테더가 내 팔에 전해지고 있었다.

나도 못하겠어요...이 말이 목구멍 끝에 걸렸지만 아예 꺼낼 수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진짜 ‘가이드러너’로 테더를 묶고 달리기 시작했다.

마음과 달리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나도 나였지만 배선애 님의 상태도 그리 좋지 않았다. 힘들다고 말하지 않을뿐 표정으로는 이미 한계점을 넘어 달리고 있었다. 보이 지도 않는 암흑을 달리며 참아내고 있는 그녀의 고통이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내가 먼저 포기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앞에서 보조 가이드러너로 달릴 때와 달리 나란히 서니 호흡소리가 더 생생했다. 앞에서 달릴 땐 몰랐는데 힘들다 못해 버티고 버티는 집념이 느껴졌다. 말 그대로 그녀는 온 힘을 다해 뛰고 있었 다. 내게 의지한 그녀의 달리기가 무겁게 전해졌다. 취미로 나선 나의 달리기가 누군가의 절실함과 맞닿아 있었 다. 순간 나는 고개를 당기고 발을 더 박찼다. 없던 힘이 어디선가 솟아올랐다. 옆을 향해 ‘힘내세요!’ 라는 말을 반복했지만 오히려 힘을 얻는 건 나였다. 도움은 한쪽 방향으로만 이뤄지지 않고 교류했다. 이거 누가 누구를 가이드하고 있는 건가 싶어 웃음이 났다. 도움을 주러 왔다가 도움을 얻어 달려 나가는 꼴이 이게 아니던가.

37km, 38km, 그리고 이제 잠실대교였다. 여기를 건너면 레이스는 막바지다. 남은 3km는 어떻게든 뛰어갈 수있겠지 하는 계산이 섰다. 잠실로 들어서니 응원인파가 엄청났다.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를 향해 집중됐고 진심 어린 응원의 목소리가 주로 가득 울려 퍼졌다. 신기한 건배선애 님의 호흡소리였다. 소리가 커질수록 더 큰 힘을 내며 거친 호흡을 뱉어냈다. 그녀의 막바지 힘이었 다. 드디어 피니쉬라인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300미터, 200미터, 내내 숨 가쁘게 달려왔던 긴긴 레이스가 끝을 향해 달릴 때, 나는 문득 깨달았다. 내가 그간 달렸던 어느 마라톤에서보다 더 크고 더 벅찬 응원의 소리가 우리를 향해 있다는 것을. 울컥하는 마음이 나를 전율케 했다.

기록은 3시간 38분.

우리는 서로 묶인 두 팔을 들어 크게 환호했다. 내가 달렸던 그 어느 대회보다도 더 멋지고 값진 기록이 아로새겨졌다. 배선애 님은 4월 보스턴마라톤을 잘 완주했다. 이 글을 쓰며 안부를 묻기 위해 통화했는데 10월 전국장애인체전 10km 대회에 참가 중이라고 했다. 그녀의 2025년 목표는 3시간 30분 이내 완주다. 언젠가 다시 그녀와 팔을 묶고 달릴 우리의 마라톤을 향해 오늘의 한 걸음을 나아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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