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미정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원 행정관
전남 고흥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의 어린 시절은 이제는 흐릿한 기억들로 마음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 어린 시절 같은 동네에 살며 자주 왕래하던 사촌 형제들 중 몇몇은 농인이었다. 나도 그들도 서울로 상경하며 가끔씩 왕래를 이어오다가, 지금은 내가 다시 장흥으로 내려오며 서로 얼굴 마주하기가 힘들어지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다른 사촌들이나 형제들에 비해 마음이 쓰이는 가족들이다.
어렸을 때야 수어도 몰랐고, 수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필요한 의사소통만을 간단한 몸짓이나 글로 해왔으나, 형제들이 모두 서울로 올라와서는 수어를 배우고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나는 그때까지도 ‘수화’(‘수어’가 맞는 표현이다.)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은 한번도 하지 못했었다. 그러던 중 한번은 회사에서 신청한 교육의 일환으로 국립국어원에서 국어 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중 “수어” 과목을 들었던 것이 내 수어 배움의 시작이다. 교육에서, 수화가 아닌 ‘수어’가 더 맞는 표현이라는 것과, 우리나라의 공용어는 ‘한국어’뿐만 아니라 ‘한국수어’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재미도 있었지만, 강사님께서 수어를 사용하면서 강의를 전달해 주시는 방식 또한 놀랍고도 흥미로웠다. 그제서야 학창 시절에 좀 먼저 배워서, 언니 오빠들과 수어를 사용하면서 대화를 해왔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후회가 들기도 했다. 그 이후에도 수어를 배우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만 가졌을 뿐, 육아를 병행하고 있는 직장인 엄마로서 시간을 내기도, 여건을 갖추기도 여의치 않아 감히 시도를 하려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다 몇 년 전, 서울에서 장흥으로 내려오며 도시에서의 바쁜 삶에서 벗어나 한껏 더 여유로운 이곳에서의 삶에 적응해 가고 있었다.
작년, 장흥군수어통역센터에서 ‘수어 동아리’ 회원을 모집한다는 공지를 보고 불현듯 옛 생각이 나 동아리에 가입하게 되었다. 농인 선생님과 통역사 선생님, 예닐곱 명의 회원들이 한 달에 두 번씩 만나 수업을 들으며, 그렇게 처음으로 ‘수어’라는 언어를 배우기 시작하게 되었다. 매 수업 시간마다, 처음 단어를 배울 땐 영어나 제2외국어보다 쉽네,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다음 날에는 씻은 듯 기억나지 않는 놀라운 경험의 연속이다. 수업도 성실히 참여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따로 시간을 내어 배운 것을 복습하기도 했었는데도 실생활에서는 수어를 사용할 일이 거의 없으니, 또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헷갈리고 잊어버리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그럼에도 아주 조금씩은 나아지고 발전을 거듭해 가고 있다고 믿고 있다.
수어를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동아리에서 “전남수어문화예술제” 공연에 서기로 하여 엄정화의 ‘페스티벌’이라는 노래를 수어로 배우고 외웠던 경험이 있다. 동아리 회원들 모두 수어 초보자라, 일이 끝난 뒤 저녁에 만나 열심히 연습을 했고 축제 날이 다가왔다. “전남농아인대회”라 해서, 전남 각 지역에 살고 있는 농인들과 관련 기관의 관계자들, 외국인 농인들과 우리 같은 수어 공연 참가자들이 모두 참석한 꽤나 규모가 있는 축제의 대회였다. 그곳에서 나는 마치 미국에 처음 갔을 때 영어를 배웠지만 말이 통하지 않았던 것과 유사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수어를 사용해 자유자재로 의사소통을 하는데, 나는 마치 말을 못하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대회 이후 몇 달 뒤에는 “장흥청소년푸푸축제”에 수어 율동 찬조 공연으로 동방신기의 ‘풍선’을 공연했다. 또 수어를 접해 본 적이 없는 군민들과 청소년들에게 수어를 소개하는 기회를 가지기도 했다. 문자 언어를 손 모양과 동작으로 표현하는 것을 ‘지문자’라고 한다. 이곳에서 참가자들의 이름을 지문자로 알려주는 활동도 하면서 보람있는 시간을 보냈다. 이후에는 정식으로 초급반 강의를 모두 듣고 수료했으며, 현재는 중급반 과정에서 수어를 꾸준히 공부하고 있다. 오십을 향해 달려가는 지금도 나의 수어 공부는 계속된다. 이렇듯 수어를 공부하면서 영화 ‘청설’이나 드라마 ‘지금 거신 전화는’과 같은 수어를 소재로 한 영화와 드라마를 접하는 기회도 많아지게 되었다. 평소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여가 시간을 떼우곤 하는지라, 매체에 나오는 수어를 보면서 이를 수어 공부를 포기하지 말고 더 꾸준히 공부하고 연습해야겠다는 동기 부여의 근원으로 삼기도 했다.
‘코다’라는 영화가 있다. 코다(CODA)는 Children of Deaf Adults의 약자로, 농인 부모로부터 태어나 수어를 구사하는 청인 자녀를 일컫는다. 해당 영화에서는 농인 엄마가 자신의 딸에게 “네가 태어났을 때, 엄마는 네가 못 듣길 기도했어.”라는 대사가 나온다. 딸이 청인으로 태어나면 농인인 자신과 청인인 딸 사이의 소통이 원활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인연으로 이어진 사람들, 누구보다 가까운 가족 사이에서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할 것을 걱정해야 하는 마음은 어떤 심정일지, 감히 상상할 수 없지만 이 대사를 곱씹어 생각해 보며 마음이 막막하기도, 먹먹하기도 했다. 수어 통역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선생님이 아시는 대부분의 농인들은 그럼에도 자기 자식은 청인으로 태어나기를 바란다고도 하셨다. 이 사회에서 소수자로, 때로 약자로 사는 그 삶이 결코 녹록지는 않았을 것임이라. 또 한번은 이런 우스갯소리도 들어보았다. 사람이 많은 장소에서 농인 친구를 빨리 찾으려면, 총 소리를 내면 된다고.
‘지금 거신 전화는’이라는 드라마에서는 수어 통역사가 산사태 뉴스를 통역하던 중 ‘산’이라는 수어가 반복 송출되는 장면이 나왔다. 극 중 아나운서가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리는 욕 제스처와 닮았다며 수어를 조롱하는 대사가 있었고, 이러한 장면이 수어를 희화화했다는 시청자들의 비판과 항의를 받기도 했다. 수어를 소재로 한 드라마가 농인들의 세상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긍정적인 계기를 주기도 하지만, 소수자의 입장일 수밖에 없는 농인을 더 존중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한번 더 생각해 보는 마음가짐이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농인과 수어가 나오는 영화들, ‘반짝이는 박수소리’, ‘목소리의 형태’, ‘나는 보리’, ‘사랑한다고 말해줘’ 등 더 많은 영화들을 천천히 시간내어 감상해 볼 생각이다. 수어를 배움으로 인해 이렇게 나의 세계가 점차 직·간접적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경험한다.
농인에게는 두 가지 이름이 있다. 원래 부모가 지어준 이름과, 농사회 공동체의 일원이 될 때 가지게 되는 ‘얼굴 이름’이 그것이다. 동아리에서 농인 선생님이 나에게도 얼굴 이름을 지어주셨다. 선생님이 보시기에 내 코 부분이 인상 깊으셨던 건지, 내 얼굴 이름은 코를 만지작거리는 동작이다. 수어를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농인인 사촌 언니와 영상통화를 해본 적이 있다. 야심차게 건 전화였는데, 배운 것도 생각이 잘 안나고, 언니가 쓰는 지문자도 바로 바로 해석이 안 되고, 해서 여전히 의사소통하는 데에는 애를 먹었다. 언니에게는 더 열심히 수어를 배워와서, 언니랑 다시 얘기를 더 많이 해 보겠다고 말했다. 진작에 사촌들과의 소통을 위해 더 노력하지 못한 내 모습이 많이 미안하기도 했다.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것이 녹록지 않은 일임은 확실하고 그래서 그런지 배운 내용도 금방 잊곤 하지만, 수어를 배우고 손을 사용하면서 치매 예방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니 속도는 느려도 천천히, 꾸준히 더 배워 볼 생각이다. 법원에 농인 민원인들이 방문하곤 하는데, 그럴 때 내가 도움을 드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수어는 ‘보는 언어’라고 부른다. 나라마다, 지역마다 수어 표현이 제각기 다르다. 그렇지만 박수 소리는 전 세계에서 모두 동일한데, 농인들의 박수 소리는 ‘반짝반짝 박수’라고 부른다. 해외 여행을 가거나, 외국인 농인을 마주쳤을 때 반짝반짝 박수를 사용하곤 하는 상상을 해본다.
누군가에게 “주먹코 해”라고 말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주먹을 코에 대는 것인데, “좋다, 좋아해”의 수어 표현이다. 점점 나의 세상으로 들어오는 수어들이 사랑스럽게 보인다. 언어를 배우는 것은 나의 세계를 확장시키는 것이다. 수어도 그러하다.